섬과 등대기행 ⑪ 완도
- 201개 섬 거느리고 쪽빛바다에 향해 웃지요
내 다시 바다로 가리, 달리는 물결이 날 부르는 소리
거역하지 못할 거칠고 맑은 부름 소리 내게 들리고
흰 구름 나부끼며 바람부는 하루와 흩날리는 눈보라
휘날리는 거품과 울어 예는 갈매기 있으면 그뿐이니.
내 다시 바다로 가리, 정처 없는 집시처럼.
바람 새파란 칼날같은 갈매기와 고래의 길로.
바다를 좋아해 열 네 살에 선원이 되었던 영국 계관시인이며 극작가 존 메이스필드(John Masefield)의 '그리운 바다'라는 시 구절이다. 눈발 날리는 겨울 남해바다 완도로 가는 길. 이따금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찬란하게 배때기 뒤집던 푸른 물결.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동행을 했다. 그 바다를 보면서 불현 듯 영화 글랑블루(Big Blue or Grand Blue)의 푸른 바다 배경이 떠오르기도 했다. 쉼 없이 갯내음 퍼 올리는 푸른 물결의 바다. 그 바다에서는 누구든 괜스레 그리움이 피어오르는 것일까.
파도가 다정하게 다가와 동행하는 아름다운 해안절경
완도는 빙그레 웃을 '완(莞)'자와 섬 '도(島)'자를 쓰는데 고향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 빙그레 웃게 된다는 섬이다. 마치 친구가 파도소리로 징을 치듯이 울려대며 다가서는 것. 물론 김을 널어 말리는 '발장'이라는 것이 왕골이라는 짚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왕골'이라는 단어가 '완'자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완도로 가는 길은 사뭇 이색적인 바다 풍광을 연출하면서 드라이브 맛을 한층 돋아주었다.
완도는 해남반도에서 작은 다리로 이어진 '달도'라는 섬을 건너간다. 달도와 완도 본섬을 잇는 560m 길이 완도대교를 건넌다. 현재 두 개의 다리가 있는데 하나는 68년 한강 인도교를 옮겨 설치한 것으로 당시 편도 1차선으로 차량통행이 불편해 이 다리는 천상 인도교로 남아 강태공들의 낚시터로 각광받고 있다.
대신 85년 2차선 완도대교를 하나 더 만든 것인데 서울에서 국도 13호선을 따라 계속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다리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기상악화로 인해 해남 끝자락에서 배가 뜨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자식들과 맞은 편 원동포구(완도 본섬 끝)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가족과 친지들이 서로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헤어지는 진풍경도 추억으로 배여 있다.
완도는 63.9㎞에 이르는 해안선을 끼고 있는데 나지막한 구릉을 끼고 달리다가 보면 어느새 다시 높은 섬모롱이가 나오고 그 아래 해안선에서는 파도자락들이 돌단풍과 동백나무 가지를 뒤흔들며 힘차게 허공으로 처 올라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시종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는 바다 경관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 바로 완도이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고 되뇌이지 않아도 신경림 시인의 '파도'라는 시처럼 검푸른 파도가 우리네 일상을 헹궈주며 사색의 공간을 마련해주는 섬이다. 파도는 부서지면서 이내 "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를 남기고/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를 남긴다/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파도는 우리를 한동안 생각에 머물렀다가 다시 생각의 갈피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바람에 몰려 개펄에 내팽개쳐지고/배다리에서는 육지에 매달리기도 하다가/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 너머/그 먼 곳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모두가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라는 그런 시 구절처럼 말이다.
작은 섬들이 푸르게 출렁이는 다도해 진풍경
완도 기행은 일단 완도대교를 건너면서 관광코스를 결정해야 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두개의 길로 나누어지는데 왼쪽이 동부도로, 오른쪽이 서부도로이다. 이 길들은 국도 77호선으로 아주 잘 닦여져 있다. 동부도로를 타면 강진 포구 방면과 맞닿은 바다 그리고 고금도 약산도 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서부도로를 타면 해남반도 방향과 횡간도 노화도 소안도 앞 바다로 드넓게 출렁여 가는 쪽빛바다의 풍경과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어느 도로를 타든지 동백나무 울창한 나무의 구릉지와 시원한 해변을 낀 평야지대나 섬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어촌 광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짐을 마주하게 된다. 하루에 이 동서 방면의 해안도로를 동시에 돌아볼 수도 있기에 어느 해안도로로 들어섰더라도 길을 잘못 들었다고 후회할 까닭은 없다.
완도는 아시다시피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이다. 청정해역에서 수많은 어자원이 서식하고 201개의 유인도와 무인도가 떠 있다. 현재 이들 섬들간에 연륙교 공사가 한창인데 완공되면 머지 않아 사계절 푸른 숲과 기암 괴석, 하얀 백사장으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섬들을 서울에서 바로 섬마을까지 질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뿐 아니라 섬 일주 후 바로 국제항 제주도로 건너 뛸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동서남북이 다 바다로 둘러싸인 완도는 동으로 고흥과 여수, 서로는 진도, 남으로는 제주, 북으로는 해남이 접하고 있어 패키지 연속관광에도 편리한 곳이다.
장보고 얼 이어받아 생동하는 포구와 해산물 수출전진기지
'해상 무역의 제왕' 장보고 위용을 지닌 완도는 소백산맥 지맥인 해안산맥의 말단부가 침수되어 생긴 섬이다. 완도는 본섬(완도읍)과 금일도, 노화도 등이 읍 단위이고 신지도 고금도 약산도 청산도 소안도 보길도 등 9개 면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본섬과 고금도 청산도 보길도 신지도 등은 본디 지질시대에 육지와 연결되었다가 후빙기 해수면 상승으로 분리되었다.
섬마다 300∼500m 높이의 산을 끼고 있고 간척지와 바다 매립지를 발달해 이를 논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완도에서는 "개가 1000원 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했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김 생산 70%를 차지하고 일본 수출 첨병지역으로 떠오르면서 경제적 부흥을 맛보았던 것. 완도에서 김이 많이 생산된 것은 간석지가 발달해 영양염류가 풍부하고 민물이 적당량 유입된 지형적 요인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200여 년 전부터 이 섬에서 김을 양식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완도 사람들은 김 하나로 김자반 김국 김초밥 김부각 김무침 등 여러 반찬거리를 만들어 먹을 줄 알았고 특히 매생이국 미역국은 식탁의 주메뉴로 자리잡아 풍부한 바다자원을 바탕으로 해서 생활의 궁핍을 모르고 살았던 섬이다. 그런 탓에 교육수준이 높고 항일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발자취가 뚜렷하고 진취적인 해양문화를 지닌 섬이기도 하다. 완도 미역은 지금도 최고로 쳐주는데 국내 생산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다시마도 많이 생산되고 있다. 특히 톳은 지금도 전량 일본으로 수출해 불경기임에도 이곳 사람들의 벌이는 쏠쏠한 편이다.
청해진과 구계등 해변 등 역사와 신비로운 바다 풍경
완도의 대표적 볼거리로는 정도리 구계등 해변을 꼽을 수 있다. 드라마 배경 화면으로도 등장했던 '구계등 짝지'는 조약돌이 파도에 씻겨 밀리면서 해안에 아홉 계단 모양으로 쌓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 800m 길이의 해변에 널려 있는 조약돌은 달걀 크기에서 참외 수박 만한 것까지 다양한 조약돌로 오랜 세월 파도에 씻기어 매끈매끈 둥글둥글 다듬어져 있다. 이 돌들 사이로 파도가 밀려와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가 빠져나가는 해조음에 귀기울여 보면 영락없이 환상적 자연의 교향악을 듣는 것만 같다.
해변 뒤쪽으로는 참나무 게피나무 떡갈나무 등 40여종의 상록수와 단풍나무가 우거져 이 바다를 더욱 뽐내며 한 폭의 풍경화로 완성해주고 있다. 완도 지역 학생들은 이곳으로 소풍을 오는데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조약돌 등성이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면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벅찬 일인가를 절로 실감하게 된다. 신라 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이곳을 발견한 후 궁중에서 녹원지로 봉하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5분 거리에 석장포가 있다. 햇살 눈부시게 쏟아지는 바다에 오고가는 배들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등부표 뒤로 펼쳐진 섬들이 대모도 소모도 그리고 그 뒤로 '서편제'를 촬영했던 청산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석장포는 왜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화포로 일본군을 물리쳤던 곳으로 최강장관 기념비가 해변가에 세워져 있다.
활어 공판장에서 파닥이는 고기와 경매소리
다시 5분 거리에 완도항이 있다. 이곳 활어 공판장에서 파닥이는 고기들과 경매를 하며 생동하는 어시장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청정해역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고기와 하루 두 차례 열리는 경매를 통해 전국 제일 수산양식 섬답게 경매 후 곧바로 전국으로 팔려 나간다.
공판장 앞에 방파제 등대가 한 개의 섬을 향해 쭉 뻗어나가고 있는데 그 방파제 끝자락에 떠 있는 섬이 구슬 같은 섬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주도'이다. 보면 볼수록 동그맣고 아담하다. 천연기념물인 이 섬은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마치 한 개의 분재 같기도 한데 137여종의 상록수가 자라고 있는 식물의 보고이자 완도의 상징인 섬이다.
다시 5분 정도 달리다보면 장좌리가 나온다. 마을 입구에 4,000여평 규모의 청해진 수석공원이 먼저 나그네를 맞는데 완도 201개 섬 해안에서 주어온 돌들이다. 억겁의 세월 동안 풍랑을 헤치며 견뎌온 그런 기암괴석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마을로 조금 더 들어 가면 앞 바다 작은 섬 '장도'가 떠 있다.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넓적한 섬으로 일명 장군섬이라고 부른다. 이 섬은 장보고 유적지로 마을에서 180m 떨어져 있는데 하루 두 차례씩 썰물이 되어 바닥이 드러날 때 걸어 들어갈 수가 있다. 지금도 장보고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며 국제적 해상권을 장악했던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장도 해안에는 소나무로 만든 1,000여 개의 목책이 박혀있고 빗살무늬 맷돌, 발이 세게 달린 솥과 철제소반, 토기 사당 등 유적 등이 있으며 현재 완도군은 이 섬을 세련된 유적지로 단장중이다. 특히 마을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이면 장보고를 비롯 선조들을 기르고 동네 무사를 비는 당제를 모신다. 당굿, 그리고 뱃놀이하며 지내는 선상굿, 동네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돌며 펼치는 사장굿, 우물을 돌며 징과 북 꾕과리를 두들기는 샘굿, 당산굿 등은 보는 이마 다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장좌리는 특히 동백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 마을이고 바로 이웃마을 대야리, 영흥리 갯벌에는 자연산 꼬막과 바지락이 많이 나와 언제나 저녁 먹거리로 호미 하나 들고 가면 푸짐하게 만찬을 준비할 수 있다. 바로 앞에 떠 있는 섬이 완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 고금도. 그 앞에 사이좋게 있는 섬이 해안선 5.8㎞의 사후도이다. 모래가 많고 까마귀가 많다해서 '사조도'로도 불렸다. 주위에 딸도(達島)가 있어 '사위도'라는 뜻의 섬이었는데 나중에 사후도로 바꾸어 불렀다. 그 옆에 약산도 그리고 마량 포구도 보인다.
유· 무인도로 가는 길목인 포구와 마주보며 사는 외딴 섬
완도의 작은 마을들은 저마다 앞 바다에 떠 있는 섬들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이들 포구에서 작은 배들이 또 다른 작은 섬 주민들의 살아가는 발이 되어주고 있는 것. 이처럼 완도는 우거진 상록수림과 푸른 파도가 동시에 출렁이고 갓 잡아온 싱싱한 생선과 그물에 털려 나가는 갯바람에 묻어나는 청정바다의 향기를 동시에 맡을 수 있는 곳이다.
통통대는 배들과 함께 흔들리며 생동하는 어부이며 갯펄에서 저녁상을 위해 굴 따는 아낙들의 평화롭고 정겨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섬이다. 육지에서 섬과 섬을 이어가면서 도대체 진정한 땅끝이 어디인가를 되묻게 하는 섬이기도 하다. 새로운 땅끝마을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전형적인 어촌의 모습과 함께 장보고의 역사적 현장을 동시에 둘러보게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그렇게 역사와 해양무역의 또 다른 전초기지로 부상하는 섬이다.
지금 세계는 육상자원이 서서히 고갈되어 가면서 인류의 최후 보루를 섬이요 바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해양개척은 필연적이고 미래학자들은 21세기는 해양의 시대라 부르고 있다. 1,200여년 전 찬란한 해상왕국을 주도한 장보고의 얼은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원대한 꿈을 심어주고 한편으로 해양개척 정신을 부단히 일깨워 주고 있다. 그래서 완도 바다에서 만난 푸른 파도들이 섬을 철썩이는 것은 어쩜 우리네 마음을 한없이 채찍질하는 소리로 들렸는지도 모른다.
● 미니상식/해상왕 장보고에 대하여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 발견, 바스코 다가마 희망봉 발견보다 무려 650여 년이나 앞서 장보고는 바다로 진출 해양무역을 주도했다. 통일신라 말기 전남 완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장보고는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창던지기에 능했다. 친구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이 민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당나라 군대에서 30세 초 군사 5천명을 거느린 '무령군중소장'에 이르러 출세가도를 달렸다.
당나라 해적선이 신라인을 납치해 노예로 매매하자 격분해 귀국후 청해진을 설치하고 군사 1만명을 거느린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이후 중국 일본에 흩어져 있는 신라·고구려·백제 유민을 규합 신라·당·일본의 삼각해상무역을 주도하고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 무역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신라 중앙 귀족들은 장보고 세력 확대를 우려해 중앙정치무대의 군림을 꿈꾸어온 염장을 시켜 846년 장보고를 암살했다. 한동안 청해진은 염장에 의해 관리됐으나 5년만에 해체되고 장보고 부하들은 중국과 일본으로 도피, 청해진 주민들은 전북 김제 벽골제로 강제 이주됐다.
그러나 훗날에도 장보고 시대의 조선술, 항해술, 해양경영 기술은 임진왜란 때 일본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서남해안의 세력이 없었던들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 완도 가는 길
서울 강남터미널=>완도 고속버스(1일 4회 운행. 6시간 소요)/서울=>광주=>해남(또는 강진)=>완도/서울=>목포=>해남(강진)=>완도/부산=>광주=해남(강진)=>완도/대전=>광주=>해남(강진)=>완도/제주=>완도 여객선(3시간 소요)/광주, 목포, 강진, 해남방면에서는 완도행 직행버스가 10분단위로 운행/완도군청 문화관광과(061-554-3708), 항만터미널(061-554-3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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