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뚝뚝 떨어져 가던 5월에/그보다 짙은 낭자한 피의 5월에/천 년 한을 통곡하는
너 빛부리 우리들의 고향,/두루미의 목통으로 부르고 싶은 땅이여/네가 흘린 피, 네가 흘린
눈물이/강으로 바다로 흐르지 않아서 아니라/너를 위해 죽은목숨, 너를 위해 바친 고난이
부족해서가 아니라/광주여, 너를 민족의 성지라 부르기엔/너를 위대한 도시라 찬양하기엔
아직 우리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구나" (문병란, '송가' 중에서)
어느덧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의 백두대간 '5·18'. 수많은 죽음을 밑거름 삼아 현대사
에 올올히 선 역사의 '큰산, 5·18'. 필자는 당시 고교생이었다. 이틀간 계속되던 교내 체육
대회 때 시내 한복판에서 펑펑 최루탄이 터지고 있었다. 계절의 여왕 5월의 하늘은 검붉은
연기로 가득했다. 여느 날처럼 대학생 형들의 시위쯤으로 생각했다. 얼마 후 학교 스피커에
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교생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지금 모든 경기를 중단하고 교실로 들어가세요!".
체육대회가 중단되고 종례시간에 담임은 "너희들, 절대 샛길로 새지 말고
이 길로 귀가해야 한다!"라는 말만 강조했다. 귀가 길에 공수부대 군화발 소리가 울렸다. 자
취방 근처인 조선대 숲에 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금남로에서는 교수와 대학생들이 태극
기를 앞세우고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긴 저항행렬을 이어갔다. 고등학생들도 책가방을
허리춤에 끼고 그 대열에서 함께 구호를 외쳤다.
그런데 신문과 방송은 연일 '폭도들', '지역감정 자극', '난동이 극에 달해', '군이 사람을 죽였
다는 유언비어 난무' 등 현장의 잔악한 사실들은 온통 유언비어로 폄하 왜곡했다. 군에 저항
하던 시민들을 이성 잃은 폭도들로 표현했다. 일종의 집단적인 마녀사냥이었다. 그렇게 광주
는 언론에 짓밟히고, 계엄군에 짓밟히는 이중고 속에 현장에 접근하지 못한 국민들로부터
고립무원의 도시가 되었다. 통신 두절, 버스 열차 운행 중단. 마치 미군이 이라크를 치고 들
어갈 때 외부와 단절을 통해 '이상한 후세인의 나라'로 치부하던 상황과 흡사했다.
그런데 20일 밤 문화방송이 계엄군 발표를 아무런 검증 없이 부각 보도하자 그 분노는 폭발하
고 말았다. 방송사로 몰려가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졌다. 그리고 불길이 치솟았다. 그런 분노
는 곧 KBS 건물로도 이어져 역시 불길에 휩싸였다. 이런 언론에 대한 불신은 외국 언론사
기자들에 대한 친절한 안내와 보호로 이어졌다. NYT, TIME, UPI, API, 마이니찌 등 외국
언론은 "군, 시민 향해 총 겨눠", "계엄군 총격에 시민 사망", "광주시민 외부와 통신 두절",
"계엄군 총탄에 수 백여 시체 발견" 등 사실보도에 힘썼다. 그러나 우리 언론의 왜곡보도
행태는 멈출 지 몰랐다.
"또 가두시위라니…혼란은 민생위협(조선일보/80/5/15)”, "서울을 이탈한 학원소요 주동학
생 및 깡패 등 현실 불만세력들이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서울신문. 80.5.21일자),“외
적보다 무서운 내환- 안보적 중대사태이다(서울신문/80/5/22)”, "간첩에 의해 조종 받는 폭
도세력, 시위선동 간첩 1명 검거(조선일보/80/5/25)”, "격앙된 군중 속에서 간첩이나 오열이
선동하고 파괴와 방화 살상의 선봉적 역할을 하는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조선일
보. 5.25일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조선일보. 5.28일자).....
그렇게 수많은 시민들을 짓밟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에게 언론은 다시 신용비어천가를 부른
다.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경향신문. 80.8.19일자), "새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
통령"(동아일보, 80.8.29일자), "장군은 누구인가? 그렇다. 장군은 숨은 별이었다."(서울신문.
80.8.19일자), "80년대 서장-활력과 확신의 시대"(MBC. 82.3.1 방송).....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왜곡이 극에 달할수록 계엄군과 싸움도 격렬해졌다. 급기야
계엄군이 M16에 실탄을 쏘고 전남도청에서 본격적인 집단 발포가 시작됐다. 시민들도 무장
의 필요성을 절감, 탱크와 무기 등을 탈취해 이제는 '시위대'가 아닌 계엄군과 맞선 '시민군'
이 되었다. 그러나 훈련으로 단련된 계엄군에게 시민군은 '다윗의 골리앗'일 뿐이었다. 시민
들의 격렬한 저항에 계엄군은 끝내 후퇴는 했지만 그 빈자리에는 수많은 피흘림의 상처와
주검이 남아 있었다.
그런 뼈아픈 5월이 왔다. 또 다시 언론은 반성 없이 망월동 망자들의 눈물겨운 화제거리를
감성적으로 보도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크는 나무라고 했다. 광주항쟁은 민주주의
를 향한 싸움이었다. 그래서 피해자는 저렇게 드러누워 있거늘, 그런데 가해자는 없다. "내
가 죄인이니 용서하시오!"가 아니라, "내 통장에는 29만원뿐"이라며 골프를 치러 다니는 사
람의 일갈을 기꺼이 가십기사로 써주는 저 넉넉함. 그런 언론의 여유라면 한번쯤 파묻힌 영
령들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떨구어줄 수도 있으련만. 하여, 천국에서라도 그 눈물 이승의 깨
달음의 눈물이 되어 묻힌 자의 영혼에 가 닿아가 축축이 적셔줄 수도 있으련만.
우리 언론의 침묵은 너무 길다. 말하지 않아야 할 때 왜곡하고,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언론의 침묵은 너무 길다. 한 획, 한 획, 저 굴종의 글나부랭이를 수많은 영혼이 당해내지 못한
그 아픔은 너무 길고 깊기만 하다. 지금의 침묵이야말로 멸시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영국 속담에 거짓말은 다리가 짧다라는 말이 있다. 링컨은 또한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늘 속일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 언론이 되새김질해야 할 화두이다.
한번 가보시라 저 망월동 묘역. 제3묘역. 80년 5월 남편 마중을 나갔다가 전남대 앞 평화시
장 입구에서 계엄군 총격으로 숨진 최미애씨(당시 24세)가 묻혀 있다. 당시 임신 8개월의 만
삭, 계엄군은 뱃속에 생명을 안은 이 젊은 아내를 사살한 것이다. 또 하나의 묘비, 양희영
(19세)·양희태(17세) 형제가 잠들어 있다. 당시 고교생인 이들은 영광에서 소위 광주로 유
학 온 꿈 많은 소년들. 이들이 왜 총부리에 꽃잎처럼 떨어져가야 하는 것인가. 두 아들을 잃
은 아버지 양찬모씨는 급성 뇌졸중으로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정신착란증세로 세상을 떴다.
네 가족이 '5월의 광주'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모든 가족이 떠났으니 이 묘역 앞에는 꽃 한
송이 얹혀 줄 사람이 없다.
침묵한 사람들이여 이 빈 공간에 꽃 한 송이 얹혀 주시라. 주검마저 못 찾아 행방불명의 가족으로
한평생 살아가야 할 저 구겨진 가슴들 또한 누가 펴 줄 것인가. 그렇게 5월은 오고 또 갈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 사회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작동돼야 한다. 먼저 그 키를 언론이 틀어야 할 것이다.
부지런히 작동하는 열쇠는 빛나지만 방치한 열쇠는 녹슬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제는 좀 변하라고 하건만 언론은 그때마다 '언론탄압'이라고 둘러댄다.
법 좀 지키라고 하면 '시장경제에 맡기라', 언론자정 좀 하라하면 '언론자율'에 맡기라고 우긴다.
참 신간 편한 소리다. 그래도 변해야 하리라. 길들여진 수구가 아니라 이제는 한번쯤 발길을 뒤로 돌려 앞으로 가야 하리라.
진정 우리 민주주의가 생동함을 위해. 그렇게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그래야 백성이 바로 살 수 있을 터.
진정, 그 길은 요원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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