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돌아가자(칼럼)
초등학교 아들 녀석과 함께 한 구청에서 주최하는 이순신 탄생기념 그림그리기 대회에 나갔드랬습니다. 서울시 중구 필동 한옥마을에는 계곡 물소리도 들려오고 고향 들판에서 마주쳤던 진달래, 개나리, 철쭉꽃이 참으로 아름답게 피었드랬습니다.
숲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한옥 사랑채 앞 연못에는 색색의 잉어들이 유영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따금 처마 끝에서 쉬던 비둘기들이 연못가를 아장아장 걷곤 했드랬습니다. 울긋불긋한 것은 꽃과 물고기들뿐만 아니었습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크레파스와 물감 도화지를 들고 연못과 개울가에 모여 앉아 이순신의 어린시절과 일본군을 격파하는 임진왜란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큰 칼을 높이 쳐들고 호령하는 충무공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있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반농반어촌이었는지라, 드라마 해신을 촬영하는 완도인데 섬모롱이에서 총싸움을 하고 절벽 아래로 다이빙하는 그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간혹 삐비꽃을 뽑아 물고 동백떡도 따 먹곤 했드랬습니다. 고향은 늘 그립고 우리에게 포근한 곳입니다. 도심이지만 그런 이미지를 강렬하게 전해주는 한옥마을 정취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것
그렇게 자연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다음날도 꽤 상쾌해 집니다. 자연이 챙겨주는 엔돌핀과 정서적 교감의 효과가 무엇인지를 새삼 느껴보게 되는 것입니다. 풀비릿내 나는 향기는 신작로 오르막길에서 자전거 패달을 밟고 내려가는 기분처럼, 밟을수록 발밑에 밟히는 그 설레는 바람 소리처럼 싱그럽고 상쾌한 것입니다. 가슴을 가르는 봄바람 소리가 팔랑개비처럼 마음을 상큼하게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내 도시의 희뿌연 창밖마저 환하게 씻어주고 밝혀주는 듯 합니다. 그래서 자연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 바람인 듯 하지만 물총을 쏠 때 바람이 많으면 피스톤이 밀어내는 물줄기가 머얼리 허공을 뚫고 가듯이 삶도 여유로우면 수많은 상상의 공간과 사색의 마당을 확장시켜 줍니다. 자연은 그런 것입니다. 자연은 그런 특전을 우리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잠깐 마주친 풍광이 삶의 언저리에 자리 잡은 우리네 마음을 전환시켜 줍니다. 그것은 휴머니즘이나 자연주의적 인식입니다.
그렇게 자연을 매개로 우리네 맑은 정서를 되살려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런 힘을 지녔고 자연은 인간에게 그런 특전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자연과 인간은 애당초 하나였던 셈입니다. 우리가 태어나 끝내 되돌아가는 곳이 바로 자연이듯 말입니다. 그것은 운명적이고 천부적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연이 일러주는 ‘차이의 문화’, ‘하나의 문화’
그렇게 이 봄날 아침을 맞았습니다. 황사 바람을 뚫고 맑은 영혼이 등불처럼, 등대처럼, 아니 꺼지지 않는 용광로 불빛처럼 세상을 비춥니다. 자연의 전이감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가슴이 헐렁해집니다. 좁은 도랑에서도 물줄기가 넉넉하고 여유롭게 흘러가듯이, 연약한 물풀 한 줄기도 그 물줄기에 휩쓸리지 않고 유연하게 휘어지며 온 가슴을 윤기 있게 헹구며 살아가듯이 말입니다. 이따금 동백잎 하나 그 도랑물에 떨어질 때 길 가던 아낙은 그 잎을 주워 한모금의 물을 받아먹곤 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연과 인간은 본디 자연스럽게 하나로 지내는 풍경의 연출자였던 것입니다.
자연에서 얻은 잠시의 추억은 우기가 고이 간직하는 기억의 샘으로 깊어집니다. 마음의 한 중심에서 샘물처럼 용솟음치는 것이 있습니다. 침침한 시야가 밝아지는 것은 환경이 밝아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뒤돌아보지 못한 내 마음의 본연에 뚝 떨어진 순수의 물방울 탓입니다. 결국은 그 한 방울이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생각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타고 납니다. 그 개성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합니다. 일종의 ‘차이의 문화’입니다. 수많은 차이의 발생 이유에는 수많은 배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인정하는 문화는 저마다의 개성과 삶의 차이를 인정하는 셈입니다. 그 차이들이 ‘하나의 문화’가 될 때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인정하는 일은 ‘차이의 문화’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차이를 인정할 때 세상은 두 수레바퀴의 시너지를 얻어 가속도를 내는 것이지요.
자연의 ‘유혹과 해방구’라는 것의 의미
자연을 통해 우리는 그런 철학의 메시지를 읽습니다. 수많은 예술가, 철학가들이 자연을 모티브로 삶을 이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런 차이를 그대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 아침입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겠지요. ‘무조건적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사랑하면서, 사랑하고 난 후에 삶이 가벼워진다는 것을 깨달음의 체험물이기도 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자연의 회귀와 자연에서 얻은 한 송이의 꽃 같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시간은 참으로 행복한 순간의 클라이맥스일 것입니다.
자연에서 돌아온 후에 아름다운 첫걸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을 줄 수 만 있다면”으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그런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어집니다. 한주를 시작하다가 다시 수요일 아니면 목요일 아니면 금요일쯤에 삶이란 다시 뻐근하고 답답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어느 고갯길에서 뜻하지 않는 비바람이 발부리에 걷힌 돌부리처럼 우리에게 닥칠 그 무엇이 예비 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그것을 지렛대 삼아 자연으로 떠날 것입니다. 자연의 사이클 속에서 사계절 그렇게 유혹과 해방구로 가는 지름길을 찾아 나서는 일은 우리의 깨달음과 행복으로 가는 길 떠남일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과 함께 한다면 시간은 물 흐르듯이 아무 일 없는 듯이 흘러갈 것이고 세월은 서서히 익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과 쓸쓸함 사이에서 삶의 그네를 타고 살아갑니다. 힘껏 굴러서 더 멀리 가기 위해 그네를 힘차게 밟기도 하고, 더 높이 올라가 세상을 굽어보기 위해 그네를 흔들기도 합니다. 흔들리는 일은 아름답습니다. 뇌리에 이유 없이 차곡차곡 쟁여 둔 사연들을 비우기 위해 우리는 온몸으로 흔들리며 살아볼 필요가 있을 터입니다.
그네가 무심히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처럼 삶의 비움과 버림의 사이를 오갈 때, 세상사는 일은 비우고 버리는 것이 많을수록 가벼워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 시계추가 늘 흔들면서 가벼워지는 것인지, 세월을 소진하며 깨닫는 것입니다. 세찬 물소리를 내는 계곡물 혹은 강줄기처럼 우리는 소진하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김질하며 살아갑니다.
“한가함은 철학의 어머니”
알고 보면, 우리네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여유를 찾을 것인가? 그것이 삶의 고민이요 키워드일 것입니다. 여유를 즐길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은 한가함을 즐길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물음일 터입니다. 한가함은 철학의 어머니입니다. 그 한가함을 찾아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떠나남의 미학을 체험하는 동안 번뇌는 한 칸을 이미 비우고 있음을 압니다.
사는 일은 그런 것입니다. 조각하는 일, 마음을 깎고 문지르고 그래서 부스러기를 버리는 일, 하나를 위해 여러 부스러기를 버리는 일 말 입니다. 우리는 그 부스러기들처럼 우리를 버리며 여유로움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는 나그네입니다. 인생은 과객입니다. 떠나고 나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길 뜬 삶에서 가벼운 것은 무언가를 비워냈다는 것을 느끼며 행복감에 겨워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삶에서 멀리 가면 갈수록 그만큼 진리에 가까이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생이란 이 세상에 철저하게 발 딛고 서서 가는 일이지만 우리가 찾는 그것, 진리는 멀리 가야 보인다는 게지요.
진리는 덕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덕은 자연에 위지하며 삽니다. 그러한 덕은 삶의 올갱이자, 삶의 생채기이기도 합니다. 자연에 발 딛고 사는 우리들의 삶의 문제입니다. 그 삶의 생채기를 조리하며 사는 일, 그것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인생은 숱한 오류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하고 허무주의에 휩싸여 있다가 다시 생명의 깃발을 흔들며 늑골 휘어진 채로 바닷물을 어푸어푸 헤치면서 가는 선박의 항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항해 말입니다.
아픔을 밑거름으로 삼는 낙엽의 은유는 무엇인가?
저 들판의 꽃은 곧 질 것입니다. 아니 꽃은 지기 위해서 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넘어지고 슬퍼하고 이별과 희망의 사이를 그네 타듯이 서커스 악단들이 외줄 타듯이 하루라는 일생을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풀이하는 삶이기에 우리에게는 수많은 굴곡과 수많은 기회를 만납니다. 어쩜 삶은 숱한 오류를 되씹고 사는 일인지 모릅니다. 예술과 과학에는 숱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 자연에서 캐낸 한 떨기 희망이 바로 우리가 찾는 진리가 아닐까요.
우리는 자연에서 그 진리의 보물찾기를 하며 삽니다. 진리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탈언어’를 배웁니다. 저 자연이 말없이 건네는 ‘기호’를 읽습니다. 해독하기 어려울수록 사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 그저 웃습니다. 고뇌의 모든 것을 웃음으로 탈탈 털어낸 것입니다. 비우는 일입니다. 낙엽 한 장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스스로 성장한 생목에서 연을 뚝, 끊고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아픔입니다. 그러나 낙엽은 아픔의 흔적도 없이 남은 엽록소마저 햇볕에 다 쥐어짠 채로 제가 태어난 나무 밑동 아래서 겨울을 만나 썩어갑니다. 나무들의 밑거름이 되어 찬란한 봄날을 기다랍니다. 숲에는 그 낙엽이 떠난 자리에 다시 새 생명의 잎들이 피어나고 있음을 일러줍니다.
아름다운 자연에 진리를 자유케 하자
그런 숲에서 나부끼는 낙엽을 보면 재잘거리는 초등학교 신입생들의 함성 같기도 합니다. 생명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피아노 소리에서 재잘대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처럼 봄바람에 일렁이는 저 낙엽들의 푸르른 물결... 그런 숲 아래서 아이들이 그림그리기를 합니다. 자연과 자연이 잉태한 새 생명들의 조화를 읽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알겠습니다. “왜 사느냐 묻거든. 그저 웃지요”라는 의미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에서 매일 생산되는 진리를 찾아 떠나는 연습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산책이기도 하고 여행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 자연으로 돌아갑시다. 자연으로 돌아가, 우리들 마음을 가볍게 내려놓고 진리를 자유케 합시다. 숱한 기호를 과잉생산하지만 말고 삶도 자연도 진리 안에서 스스로 자유케 합시다. 그렇게 자연을 사랑하며 배우며 살아갑시다. 그것이 사랑의 원천이요,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일 터입니다. 이 봄날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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