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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

섬과 등대여행/섬사람들

by 한방울 2005. 2. 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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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풍경 19] 김종길作, ‘설날 아침에’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 (김종길, ‘설날 아침에’ 전문)


1월이면 새해라도 들뜨고 2월이면 진짜 설날이라고 들뜬다. 언뜻 지난 한 달은 거저 맛보기로 보낸 것 같은 느낌이다. 하여간 진짜 온 국민의 설날은 음력 1월1일이다. 팔도강산에서 모인 서민들은 고향으로 가는 길에 동행한다.


그런데 고향 가는 열차표를 쥐고 플랫폼에 서는데, 톨게이트를 벗어나려는데 어린 애들과 달리 마음 들뜨지 못한 것은 왜일까? 새해가 밝았는데 희망의 실낱이 크게 도드라지지 못하는 것은 서민들의 인지상정이리라. 가장의 어깨 무거움 탓이리라. 사업에 나자빠져지고, 구조조정 칼날에 마음 배이고, 못 다한 효도만큼 흰머리만 늘고 거무스레한 주름살만 깊어가는 노부모 앞에서 애증의 그림자는 고향집 동구 밖 어스름 만큼 깊어간다.


그렇게 고향 가는 길. 도로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줄기 강물처럼 남녘으로 남녘으로 이어진다. 차장에 스치는 얼굴들이나 고향집 앨범처럼 액자 그림으로 들어오는 창밖 풍경이나 주제와 소재가 일치한 우리네 서민들의 자화상이다. 입김어린 창에 기대어 졸고 있는 풍경이나, 갓길에서 허리를 펴는 풍경들. 휴게소 아닌 국도 변에서 길게 이어져 쉼 호흡하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풀섶에서 볼 일을 보는 풍경들은 모두가 서로에게 쉬엄쉬엄 가자는 말없는 메시지이다.


그렇게 당도한 고향에 가면 장작불 지피어 둔 사랑방에서 화투장을 던지고 저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저마다 사는 길이 다른데 술 한 잔에 뱉어내는 이야기들을 모두우면 모두가 사는 일이 매 한가지이다. 그리고 모두가 이 땅의 밑뿌리인 농어민의 아름다운 후예들이었음을 안다. 몇 푼 땅뙈기 하나 장만해주지 못한 송구함은 선산 문제에 애써 관심을 털어놓게 하고 이장이나 청년회장을 만나면 잠시 잊고 산 고향에 대한 송구함이 마을 일에 지독한 애정을 표하게 만든다.


그렇게 지엄한 훈수를 두면서 아랫목의 밤은 깊어가고 인정의 산물인 덕담은 아름다운 토론문화가 되어 마을 앞 강물처럼 파도처럼 우리네 가슴 속을 깊이도 파고들어 출렁인다. 사는 것이 그런 것이다. 잊혀진 가족사랑, 이웃사랑, 농촌사랑, 마을 어르신네들에 대한 존경스러움이 이내 고향에 대한 깊고 깊은 뿌리를 되새김질하게 한다. 타고난 고향,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고향 가는 길은 그런 뿌리를 찾아가는 연어 같은 것이다. 육지 끝이면 좋으랴만 큰 섬에서 다시 정기여객선도 가지 않은 작은 섬으로 배를 타고 건너는 사람들, 고속버스가 가지 않은 소읍에서 다시 산골짜기로 가는 경운기를 타고 고갯길을 넘어가는 사람들. 마을버스 종점에서 다시 억새꽃 휘날리는 언덕배기 내려서 나룻배를 타고 보따리 들쳐 메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


그 길을 돌아보면 지금의 아픔은 참을만한 것임을 터득케 한다. 잠시 잊혀진 고향과 고향사람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몇 번씩이나 되새김질하게 한다. 그 정겨운 강산과 사람들의 모습이 각진 객지생활의 정서를 다듬어주는 것이리라. 그래서 고향은 아름다운 것이리라.


그래서 고향에 다녀오는 길은 희망의 고갱이를 담아오는 일이다. 가난 속에서 억장이 무너져도 꿋꿋하게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의 풍경이 한동안 객지 삶의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설날 아침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알고 보면 “세상은/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을 느낀다.


김종길 시인의 ‘설날 아침에’ 라는 시는 이런 세상살이를 간결하게 그려놓은 풍경화이다. 이 시는 그런 풍경을 아주 평범한 시어로 간결하게 그려냈다. 희망이란 건강한 삶을 희구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 길의 가능성을 위해 오늘의 열정을 사랑하게 만든다. 살다보면 혼돈에 휘말리기도 하고 그런 사회에서 잠시 울고 가치관이 요동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가야할 길은 능선 넘어 희망으로 가는 길임을 일러준다.


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다양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설’이라는 지렛대로 보다 더 산뜻한 삶의 맛과 삶의 의미를 우려내는 깊은 강물의 맛을 되새겨 볼 일이다. 묵은 해를 보내고 맞는 음력 새해 설날에는 잠시 각박한 인생살이의 물굽이를 다 비워 버리고 밝고 맑은 희망의 물살을 어푸어푸 힘차게 헤쳐 가볼 일이다. “새해는 참고/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고향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훈훈한 연기처럼 삶의 에너지가 뿜어내는 체온의 열기를  이 창공에 뿌려볼 일이다.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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