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울음 단추」가 고요아침에서 출간했다. 52편의 풋풋한 농어촌 소재를 중심으로 작품을 엮어낸 이 시집은 어머니와 자식을 둔 인생 고갯마루에 선 시인이 뒤안길과 이녁의 쓰디쓴 삶의 흔적들이 눈발처럼 사라진 여백의 공간에서 자유과 허무 혹은 외로움의 체험기를 진솔하게 그려낸 시편들이다.
어릴 적 긴긴 밤
방 윗목에서 석화 까고 바지락 까는 우리 엄마
석화 바지락 까는 소리 온 식구의 자장가였지
대덕장 칠량장 마량장
강진읍장에서 그 갯것, 내다 팔아
우리들 용돈과 제끼장 사주고
더 모아 공납금 주었지
7남매 새끼들이 돈 주라고 보채면
조세 호멩이 들고
거침없이 뻘밭으로 달려가신 울 엄마
85세 세월 나이 잊고
바다 나가는 일 아직 남았네
이제는 눈에 삼삼한 손자 녀석들 촐랑촐랑 밟혀서일까
나는 오늘
그 석화
편하게 앉아서 먹고
또 잠이 오네
- ‘철없는 잠’ 전문
이 시는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시공간이 파노마라처럼 스치는 한 편의 액자그림이다. 엄마가 ‘석화 바지락 까는 소리 온 식구의 자장가였’다. 아니, 자식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도 엄마는 식솔들을 위해 밤새 조세(굴 까는 어구)를 찍고 하얀 굴 알맹이를 꺼내 모았다. 그것을 장에 내다 팔아 ‘7남매 새끼들’ “용돈과 제끼장(공책) 사주고/더 모아 공납금”을 마련했다.
아무리 삶이 팍팍하고 힘들어도, 찬바람 쌩쌩 부는 날도 엄마는 “거침없이 뻘밭으로 달려”갔다. 어느덧 85세이지만 “나이 잊고/바다 나가는 일 아직 남았네/이제는 눈에 삼삼한 손자 녀석들” 때문이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7남매를 키웠고 잘 자라줘 고마울 뿐이다. 자꾸 못해 준 부분만 기억나는 울 엄마는 푸른 물결처럼 촐랑촐랑한 손주들이 또 하나의 희망이고 기쁨이다. 그러니 더더욱 바다로 나가고 싶다.
이제 엄마가 갯가로 나가는 일은 또 하나의 행복을 만드는 과정이다. 열매를 따로 가는 길이다. 그 시절보다야 팍, 줄어든 갯것들. 허구한날 갯벌체험이니 뭐니 바다를 긁어가는 도회지 사람들에게도 늘 마음을 열어준 바다처럼, 마르지 않은 끝끝한 갯물 같은 모성애. 그렇게 자식농사 잘 지은 울 엄마기에 시인은 석화를 달게 먹고 마음 편히 잠잘 수 있음이라.
“냄새나는 은행 알 줍는다/남새난다고/더럽다고/버린 것들 많았는데//시간이라는 것/일이라는 것/몇 시/몇 분/몇 초를 담는/하루 자루//(중략)/가을을 줍는다”(‘가을을 줍는다’ 중에서)
이번 시집은 전반적으로 회한과 눈물이 스며있다. 글의 진정성을 살려준 대목이다. 솔직담백한 서사가 젖어든 탓이다.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우리는 매일 한 자, 한 페이지씩 온몸으로 기록해 나간다.
시인은 시, 분, 초를 다투며 책갈피를 넘긴다. 그러면서 뒤안길을 짚어가는 여백의 삶을 놓지 않았다. 꽃을 기르면서, 꽃차를 다스리면서, 나를 다스리면서, 꽃들의 잉태 그리고 동토를 뚫고 어깨 쑥쑥 밀며 나오는 몸부림의 순간들을 배려하고 기억한다. 이런 시인만의 체험이 잔잔하게 녹아들었다. 자연친화적인 정서와 목가적 문맥 속에 눈물과 회한이 흘러, 흘러 바다에 이른다. 진한 눈물은 갯물이 되고, 석화를 피어내고, 풍요롭고 행복한 바다를 열어준다. 희망과 행복으로 이어져서 글의 생명력도 빛났다.
문학평론에서 이런 방식의 시 정신을 일러 부활, 윤회사상, 연기망 정서가 배였다고 표현한다. 모든 삶은 우주의 순환, 삼라만상과 연결된 것으로 바라보는 문학정신이다. 시인은 문학과 삶의 성숙기에서 그렇게 고향 무대에서 세상을 마음껏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 태어난 강진이라는 시공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이번 시집을 지극히 관념적, 추상적, 편린의 언어분석으로 단편적으로 접근할 우려가 있다. 체험이 생략되고 환경이 도외시 된 도회지 인문학적 정서로 농어촌과 예술 공간이 어우러진 남도정서를 해독하기 쉽지 않을 터.
“달빛 받아 빛나는 정상/어찌 말하는 입 하나 가지지 못했단 말인가//(중략)//산 비릿내 왈칵 쏟아내는 새벽이면/매운 바람 쥐어짜며/오로지 돌이 되어야 하는 것/어찌 바위라고 변명만 하리오”(‘월출산’ 중에서)
월출산은 행정구역으로 영암군에 속하지만 강진군 벌판에서 바라보면 그 자태가 매우 선명하게 다가선다. 특히 정상 돌부리와 능선이 백설을 뚫고 나오는 모습은 절경이다. 돌산으로 유명한 이 산에는 야생 들국화가 군락지가 있고 안개 바람이 나부끼면 그 신비로움이 더해진다. 한 폭의 수묵화다. 시인은 이 바위산을 통해 “오로지 돌이 되어야 하는 것/어찌 바위라고 변명만 하리오”라고 묻는다. 살다보면 안다. 가장 깊은 감정은 침묵 속에 있다는. 때를 얻은 침묵은 지혜이며 그것은 어떤 웅변보다도 낫다는 사실을. 시인은 그렇게 월출산 바위침묵을 통해 이녁을 반추했다.
시인이 바위산을 바라보며 하는 말을 ‘홍매화’를 통해서도 노래했다. “손 곱은 눈(雪)/툭툭/서로 파고드는 날일 때//중략)//숨길 수 없는 꽃/한 송이/가슴”(‘홍매화’ 중에서). 홍매화는 쓰러지기 직전의 고목에서도 붉은 꽃을 피워낼 정도로 생명력을 자랑한다. 시린 눈 속에서 붉은 꽃을 피어내기 위해 ‘일어나고’, ‘설레이고’, 마침내 ‘한 송이/가슴’을 열었다. 문득,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떠올려준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 말이다. 그런 홍매화와 시인의 모습을 오버랩 된다.
내재율과
외재율 사이
문턱 없는 삶
참 힘들어라
안과 밖
- ‘내재율과 외재율 사이’ 전문
앞서 인용한 작품의 흐름, 그 은유의 속울음, 침묵 등을 이 시가 함축한 셈이다. 시인의 고뇌와 철학, 그 일면을 고백했다. 정진하는 스님의 고뇌의 경계가 ‘산문 안과 밖’이라면 시인에게는 ‘내재율과 외재율 사이’다. 여성으로 태어나 딸로, 어머니, 아내, 시인으로, 경영자로 살아가면서 수 없이 만나는 풍경 속의 내가 나에게 던지는 화두다. ‘문턱 없는 삶’, 누구나 ‘참 힘들’다. 경계 없는 삶을 위해 교감과 소통이 필요하고 절제와 침묵이 필요하다. 그러나 ‘참 힘들’다.
세상은 기표(상징)와 기의(의미)로 이뤄졌다. 붉은 신호등(기표) 앞에서 멈추고(기의) 푸른 신호등 앞에서 걷는다. 우리는 시 한 편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기표와 기의를 해독할 수 있다. 나와 너, 우리의 거리와 사상철학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다.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과정이 그 무엇보다도 기쁘고 행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 이 글은 <데일리스포츠한국>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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