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 하는가
박상건(시인.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올해 노벨문학상은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선정 이유를 “권력구조에 대한 지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렸고, 개인의 저항과 봉기, 패배를 날카로운 이미지로 형상화 했다”며 문학정신과 묘사력을 높이 평가했다. 정치현실을 풍자하는 해학적 문체를 구사해온 그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됐다. 남미에서 소설가 가르시아 마르케스 수상 이후 28년 만의 수상이다.
올해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2명의 화학상을 수상해 18명의 노벨상을 배출했는데 그 중 2명이 노벨문학상이다. 중국은 중국계 인사 10명이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중국 국적을 소유자는 이번 반체제 인사 류사오보가 처음이다.
국내 언론은 이번에 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 이유로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시인이 없었고 유럽작가들이 문학상을 수상해온 점으로 미루어 비유럽 출신이 유력하다는 것. 즉 고은시인이 문학상을 탈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이러한 보도태도는 문학적 시각에 문제가 있다. 너무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이다.
어느 언론도 후보자 대표작이 무엇인지, 작품이 어떻게 세계문학 범주에 근접하는지, 역대 수상자 및 경쟁자와 견주어 무엇이 경쟁력인지에 대한 분석도 반문도 설명도 없다.
언론의 병폐인 당파성이 문학저널리즘에도 관통한다. 노벨상이 티베트 독립운동가 달라이 라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수상 때처럼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측면도 있다. 그래서 노벨상이 세상 최고의 선일 수 없고 노벨문학상이 꼭 세계적 작품만도 아닌 이유이다.
그러나 세네카의 말처럼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피할 것인지, 그 해답은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가 확실해야만 한다. 이것이 최고의 선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출발선이다. 이즈음 군산시는 고은시인 생가와 문학관을 짓고 ‘만인보 조각공원’을 세운다고 한다. 하지만 더 시급한 일은 한국문학 번역기술의 전문성 강화에 대한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방안 마련이다. 일본은 1950년부터 정부가 주도해 번역지원정책을 펴왔고 2만종에 이르는 문학작품을 외국에 소개해왔다. 반면 한국은 2001년 한국문학번역원을 설립, 번역서 450종을 포함 각 출판사들이 외국에 소개한 문학작품까지 합쳐 1,500여 종에 불과하다.
한국문학 번역이 어려운 것은 유불선이라는 동양정서에 뿌리를 둔 작품세계를 어떻게 고스란히 반영해 서양정서에 접목하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30년 전 송수권 시인의 ‘산문에 기대어’를 한 미국인이 변역하면서 산사의 바깥문인 산문(山門)을 ‘temple gate’가 아닌 ‘mountain gate’라고 번역했다. 우리 고유의 맛깔스러운 한국어를 영어로 재현하는데 그만큼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문제의식과 함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한국문학 권력화와 문단 계보주의, 문학저널리즘이다. 일본인들은 저마다 나서서 노벨상을 타도록 로비하는데 우리나라는 반대로비를 한다. 상을 주는 측 입장에서 아주 탐탐치 않는 부분 중 하나이다. 노벨상 109년 역사상 자국인이 노벨상을 타지 못하도록 로비한 유일한 나라가 한국일 게다. 최근 지리산의 한 문학인모임에서는 한국 노벨문학상 후보를 교체하자며 다른 시인 지지자들이 연판장 돌리려 했다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순수와 참여로 나뉜 한국문학지형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이라는 두 축은 한국문학에 기여한 만큼 토대도 견고하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후발 문예지가 탄생했고 중앙에 대한 지역문인들의 반감은 지역문예지를 출간케 하고 또 하나의 진지가 구축됐다. 문예지와 문인 양산시대, 사이비 문학 폐단의 문제가 공존한다. 정권 바뀔 때마다 어느 문단 출신이냐에 따라 문학예술 수장이 바뀌고 문인 보조금 지원기준도 엇갈린다.
문학권력과 계보주의는 한국문학 수준과 문학저널리즘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신춘문예 심사 논란, 언론사 제정 문학상 수상 및 심사, 칼럼니스트 등 문언(文言)유착도 심심찮다. 실제 1999년 ‘언론의 문화권력화에 대한 연구’라는 한 논문에서 학문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한 신문이 문화면을 통해 특정 출판사를 집중적으로 밀어준 것이다. 한국언론재단(현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00년 펴낸 ‘한국의 신문칼럼’, 2003년 펴낸 ‘칼럼․칼럼니스트’를 보면 신문사 칼럼니스트 1위는 교수, 2위 언론인, 3위가 시인, 소설가, 수필가 등 예술인이다.
결국 노벨문학상으로 가는 길은 한국문학의 정체성을 되찾아 인류 보편적 특성으로 되살려내는 일이다. 문학전선의 생채기를 치유하고 한국문단의 쟁점과 이슈를 한국문학의 세계화로 견인해야 한다.
노벨상은 죽은 자에게는 시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노벨문학상 후보가 넘쳐난다. 살아있는 자들이 진정 문학정신으로 살아 꿈틀댈 때 그런 문학인을 아낌없이 사랑으로 발굴하고 그 문학정신을 국민정신으로 되살려야 한다.
한국인은 진달래와 뻐꾹새에서 민족정서를 읽어내지만 서양인들은 장미와 나이팅게일에 더 익숙하다. 남미문학은 일직이 스페인문학의 세계화 작업으로 소통이 가능했다. 이제 한류문화에 문학정신을 가미하고 다문화에 한국문학을 일깨우고 세계적 정서와 접합하는 한국문학, 창작지원과 세계적 문학교류 촉진에 진정성 있는 정부의 지원정책, 넓은 시야를 가진 문학저널리즘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 이 글은 한국기자협회보(2010.10.19) '언론다시보기' 칼럼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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