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겨레와 엠바고 논란

여행과 미디어/미디어 바로보기

by 한방울 2010. 7. 5. 18:07

본문

한겨레 전작권과 엠바고 논란, 국민에게 물어봐요

 

 박상건(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한미 정상회담 전에 한겨레가 한미 간에 전작권(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연기를 논의 중이라는 보도하면서 엠바고 논란이 한창이다. 경향신문도 전작권 관련 보도를 내보내 이 논란에 함께 서 있다. 한겨레와 청와대 공방은 국회 운영위로까지 번졌다.

 

한겨레는 전작권 환수 재논의를 밀실협상이라는 관점에서 취재 중이었고 또한 보도의사와 함께 엠바고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했음으로 애당초 엠바고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이동관 홍보수석은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민감한 사안이므로 엠바고를 지켜달라고 부탁드렸는데 한겨레가 깨고 혼자 기사를 쓴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엠바고는 ‘특정 시점까지 보도를 유예’하는 매스컴 용어이다. 국가 안보와 외교, 유괴 등 중대 범죄수사 등에서 국익, 공익적 사안에 한에 제한적으로 출입기자와 합의에 따라 이루어져왔다. 엠바고 논란은 어느 쪽이든 ‘국민’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잣대의 애매함 때문에 취재 편의주의와 취재원 봐주기라는 비난을 사곤 한다. 사안의 가치판단에 따라 특종과 취재윤리, 행정 편의주의와 취재 옥죄기라는 상반된 속성으로 드러난다.

 

엠바고는 다중적 대중적이고 투명하고 과학적인 정보패러다임 사회에 맞는 키워드는 결코 아니다. 비밀을 전제로 한 자체가 케케묵은 권위주의와 패권주의 유물이다. 그것이 형식을 빌려 내용을 압도할 수는 없다. 소시민 입장에서 더더욱 그들만의 리그에서 주고받는 입담으로 들린다. 1인 미디어시대에 불특정 개개인에게도 엠바고 잣대를 들이밀 것인가. 수용치 않으면 사찰과 수사로 숨통을 조일 것인가. 보도금지 발상 자체가 저널리즘에 반한다. 객관적 저널리즘에 윤리라는 주관성이 압도한 아주 특별한 사안인데, 하느님이 아닌 이상 어느 누가 국민정서에 딱 맞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덕과 윤리가 다른 점은 시대에 따라 윤리는 변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번 엠바고 논란은 윤리적 측면보다는 소모적 정치적 경향이 강하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6월 22일 ‘국익’을 이유로 엠바고를 요청했다. 하지만 같은 달 2일에 중앙일보가 이미 1면 머리기사로 전작권 문제를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전작권 연기를 우회적으로 주문했고 정상회담 후에도 이 결정을 호평했다. 반면 한겨레는 주권국가에 맞지 않고 안보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외 발언권을 위축시킨다는 것이고, 경향신문도 한국 군사주권 훼손, 대국민 기만극,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보도를 분석하면 정치권력 입맛에 맞지 않아 보도 견제용 엠바고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정상회담 결과 전작권 연기와 한미FTA 재논의가 보도 핵심이고 보면 6.2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마당에 이 예민한 주제가 또 다시 공론화 되는데 부담을 가졌을 개연성이 크다. 일반 국민들에게 이미 학습효과가 매우 높은 주제라는 점이 더더욱 그렇다.

 

우연치곤 묘하다. 엠바고 논란은 전작권 연기문제였는데 정상회담 결과는 FTA문제와 패키지로 돌아왔다. 촛불 기폭제가 된 FTA문제가 혹이 되어 돌아왔다. 시기도 야간 옥외집회가 전면 허용되는 시기이다. 시청광장에 다시 촛불이 타오른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쇠고기 수입 ‘재협의’, ‘재협상’, ‘자동차 분야 양보’ 등 이미 정치평론가 수준의 평가가 쏟아진다.

 

왜 우리가 서둘러 미국에 전작권 연기를 제의했느냐고 자존심 상해한다. 천안함 진실공방이 거센데 지난 2월부터 물밑협상으로 진행돼 와 무언가 자꾸 감추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선거참패 후 여권에서는 청와대개편 논란까지 불거지는 상황에서 굳이 특정신문과 엠바고 논란을 벌일까 의아스럽다는 눈치이다. 긁어 부스럼 만들기,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한겨레와 경향신문 두 기자 징계를 결정했다. 정말 진정성 있는 조치였을까. 아직도 그 징계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국민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길 권한다. 국민 수준과 기자의 거리가 어디쯤 와있는지, 한번쯤 가늠해보길 권하고 싶다.

 

기자들이 가는 춘추관은 국민 혈세로 만든 국민 교량자의 공간이다. 저널리스트는 취재원과 독자를 연결하는 매개자이다. 그래서 기자영혼은 자유로워야 하고 보도는 사적영역이 아닌 공적 매개변인이다. 홍보수석실은 출입기자들이 투표로 결정했다면서 “한겨레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음”이라고 강조했다. ‘일고의 가치가 없음’이라는 배타적인 용어 속에 150여명 기자의 정체성까지 그림자로 뒤덮이는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진다.

 

퓰리처는 말했다. 기자는 항상 진보와 개혁을 위해 투쟁하라고. 부당함과 부패를 결코 묵인하지 말라고. 결코 어떤 당파에도 소속되지 말라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민을, 대중의 복지에는 헌신을. 기자는 무엇이든 잘못된 일을 공격하는 걸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왜 언론 스스로 전자 발찌를 차려 하는가. 차제에 한국기자협회와 언론학계가 나서, 엠바고와 기자단 운영 등에 대해 생산적 토론이 이뤄져 시대에 맞는 결론이 도출되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한국기자협회 2010년 7월 5일 <한국기자협회보> '언론 바라보기'에도 실렸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