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건의 ‘한강 섬을 걷다’ 2] - 난지도②
쓰레기 섬에 살던 넝마주이 삶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난지도 사람들은 처음에는 땅콩과 귀리 농사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다가 쓰레기가 밀려오면서 쓰레기 줍는 넝마주이 인생으로 탈바꿈했다. 급속한 산업화 바람으로 잠실과 상계동 등 소규모 매립지들이 한계에 달하자 서울시는 시내 외곽이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새로운 매립지를 찾아냈는데, 그곳이 바로 난지도다. 1978년, 그렇게 난지도는 쓰레기 매립지로 전락했다.
서울에서 쏟아지는 구공탄 재와 음식 쓰레기를 시작으로 가전제품, 건설공사에서 나온 폐자재, 하수 찌꺼기에 이르기까지 죄다 난지도가 보듬어야 할 단봇짐이었다. 서울이 자라는 속도에 비례해 쓰레기더미도 거대한 산으로 부풀어 올랐다.
▲ 상암동 평화의 공원 인공호수에서 보이는 난지 하늘공원 전경.
정연희 씨는 소설 <난지도>에서 “난지도 쓰레기 산 위로 쏟아져 내리는 불볕은 저주였다. / 산에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썩어 가는 일과 썩어 가는 냄새뿐이었다”라고 자조 섞인 목소리를 털어냈다.
결국 매립지가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악취와 먼지를 동반한 공해는 심각한 지경이었고, 불편을 호소하는 주민들 목소리도 높아졌다. 15년 동안 쏟아 부은 쓰레기는 8.5톤 트럭 1,300만대 분량에 달했고, 두 개 봉우리로 솟아난 쓰레기 산의 높이는 각각 100m, 둘레는 2km나 됐다.
급격히 성장한 도시의 그늘 속에 갇힌 난지도는 시민들의 버림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산업화 물결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난지도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당시 난지도 넝마주이는 95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진종일 쓰레기 산더미를 헤집고 다니면서 고철, 알루미늄 깡통들을 주어 하루 일상을 꾸려갔고, 한강변에서 소주를 까면서 내일을 우러르듯이 서울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넝마주이 세계도 빈익빈 부익부가 존재했는데, 하루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과 명동일대 값비싼 쓰레기를 받아 웃돈 200~300만원을 주고 쓰레기를 거둬온 뒤 전문 고물상 도매업자에게 팔아 큰돈을 버는 사람들이 공존했다.
마포구 상암동 482번지. 그 험난한 시대의 가난처럼 버려진 쓰레기 속에는 하이에나처럼 파리 떼가 달려들고, 하루 먹거리를 챙긴 사람들은 공중목욕탕에서 악취를 털어내고는 다시 다닥다닥 붙은 5평 미만의 움막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 왼쪽은 생태공원으로 바뀐 난지 연못가. 오른쪽은 과거 쓰레기 매립지 모습.
그럼에도 ‘한강의 기적’을 일군 대한민국에서 난지도 인생들은 결코 쓰레기 더미에서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작품의 한 구절처럼 “썩어 가는 일과 썩어 가는 냄새뿐”이었던들, 김포 쪽으로 지는 노을을 벗 삼아 하루를 갈무리하던 넝마주이들의 삶은 이 땅의 가난한 민초들의 상징이었고, 그런 그들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쓰레기 더미를 흙으로 덮다
1991년 어느 날, 김포에 쓰레기 매립지를 조성하면서 난지도의 쓰레기 반입이 중단되었다. 쓰레기 매립 중지와 복원 공사를 서두르면서 1993년 난지도 매립장은 완전 폐쇄됐다. 그리고 서울시는 난지도 인근 3~4평짜리 조립식 주택을 지어 950여 세대를 무료 입주시켰다.
이후 1992년부터 2년에 걸쳐 주민 보상이 이루어지고, 난지도 사람들은 아파트 분양권을 거머쥐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서울을 떠나 안양 등 경기도로 이주했고, 일부는 영구 임대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렇게 난지도 사람들이 떠나고, 버려진 땅에 대한 개발대책은 쓰레기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흙을 덮는 방법이었다. 매립한 쓰레기를 다른 곳으로 이송할 경우 그 지역의 또 다른 오염문제가 발생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면서 침출수와 유해가스를 처리하는 ‘안정화 작업’도 시작됐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만 않았다. 현재 서울시는 ‘안정화 사업’을 통해 유해가스는 모두 수거해 열병합 발전에 활용하고 있다. 침출수는 차수벽을 세워 오염된 물을 정화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아무튼 안정화 시스템의 철저한 운영과 매립지 주변 오염도를 지속 점검하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처럼 난지도가 생태공원으로 되돌아오기까지 인간들은 그 심장에 15년 동안 쉼 없이 피와 땀을 쏟았다. 1993년 3월 매립 중단, 1999년 초부터 월드컵주경기장 건설 착수 등 난지도 일대 재단장이 이어졌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난지도에 어두운 그림자가 쉽게 걷히는가 싶더니만, 2005년 10월 서울 시민 누구나 쉽게 이용토록 한다는 골프장을 건설하려다가 환경단체와 갈등을 빚었고, 골프장 관리운영권을 두고 체육진흥공단과 법정 공방, 골프장 백지화와 공원 전환 등 우여곡절도 겪어야 했다.
서울시와 환경단체를 위시한 시민단체의 분쟁 속에 난지 골프장은 4년 동안 파행 운행되어 왔고, 2008년 6월 가족공원으로 용도변경이 확정되었다. 늦게나마 모든 시민들의 공간으로 바뀐 것은 다행이지만, 230억원의 시민 혈세의 낭비와 정책 혼선은 난지도 역사에 또 다른 상처로 남아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이 글은 서울타임스(www.seoultimes.net)에 [박상건의 ‘한강의 섬 걷다’] 제목으로 동시 연재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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