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더니, 제주공항 아래 비경
[박상건의 섬과 등대이야기 72] 사라봉 산지등대와 도두항 해안선 기행
▲ 제주공항 착륙 2분 전 제주항으로부터 25km 떨어진 애월항과 노꼬메 오름 항공사진
▲ 제주바다와 산지등대 등대불빛을 발산하는 등명기가 당당하게 제주국제항을 내려다보고 있다.
제주를 찾는 대부분 여행객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렌트카, 대절버스에 오른다. 공항을 빠져나가 일주도로를 타고 공항을 벗어나는 일이 제주여행의 시작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제주공항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산지등대가 있다. 정확한 주소지는 제주시 건입동 340번지. 우리나라 아름다운 등대 16경 중 한 곳이고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이다.
전쟁과 식민지 고통 이기고 제주도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인등대
▲ 수평선에 걸터앉은 늠름한 산지등대와 아스라한 제주 수평선
▲ 두 개 등대 사이로 먼 바다를 향해 항해하는 선박들
이 등대 바로 아래가 제주 국제항구. 산지등대는 제주도 북부해안을 드나다는 국내외 대형 여객선과 화물선의 좌표이다. 제주 앞바다 황금어장을 찾아오는 전국의 수많은 어선들의 등불이다. 지형적 특성 탓에 오래 전부터 산지등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만큼 유서 깊은 산지등대. 일본은 한반도 진출과 청일전쟁, 러일전쟁 교두보로 우리나라 해안 전략요충지마다 등대를 만들었는데 2차 대전 때 미국에 패하면서 우리나라 등대 80%가 파괴되었다. 1948년 5월에 조선해안경비대가 해안에 남아 있는 등대를 파악한 결과 당시 18개 유인등대만이 운영 중이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산지등대가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산지'라는 명칭은 산지촌(山地村)에서 유래된 것이다. 처음엔 산저(山低)로 부르다가 산지(山地)로 변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산지천 상류의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한라산 줄기인 148m 사라봉이 북으로 뻗어 내려오다 해안가에 이르러 다시 높이 솟아올라 산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사라봉 중턱에 우뚝 서서 제주항과 추자도 해상까지 비추는 산지등대
▲ 등대 망원경으로 수평선 밖 아스라한 섬과 바다를 조망하는 여행객들
▲ 등대 아래 제주국제항구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아무튼 등대가 있는 사라봉은 제주도 대표적 공원인 산중턱에서 탐라의 관문인 제주항 뱃길을 비추고 서 있다. 어느 등대가 그렇듯 해안 절벽에서 우뚝 서서 드넓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등대사무실 옥상에 오르면 아스라한 수평선이 한 폭의 수채화로 펼쳐진다. 아기자기한 해안선도 일품이다.
등대 옥상에는 망원경이 설치됐는데 산지등대로부터 45km(24마일) 해상에 어장의 보고로 제주와 전남 완도군 간에 헌법재판소까지 가며 분쟁했던 장수도(사수도)가 있다. 50km 해상에 추자군도가 펼쳐지고 61km 해상에 완도 여서도, 78km 해상에 완도 청산도, 89km 해상에 여수시 거문도가 있다.
산지등대 불빛은 15초에 한 번씩 반짝이면서 48km까지 훤하게 비춘다. 거문도 등대가 42km 떨어진 부산 오륙도, 영도, 일본 대마도 앞바다까지 비추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산지등대 불빛도 전남 완도 앞 제주방향 다도해 섬과 어민들의 뱃길까지 비추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 연인들의 산책 코스로 사랑받는 도두항 방파제 등대
▲ 방파제 등대 아래 짙푸른 바다에서 물질 중인 해녀들
산지등대는 1916년 10월 무인등대로 처음 불을 밝혔다. 유인등대가 된 것은 1917년 3월. 그리고 1999년 12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등탑을 만들었다. 등대의 등탑은 백색 원형콘크리트 구조로 높이는 18m 크기이다. 2002년 12월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한 매우 높은 빛 에너지를 자랑하는 고광력 회전식 대형등명기로 교체됐다.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산지등대는 붉은 빛을 피워 물고 어선들을 반기고 지켜주는 헌신적인 삶의 상징이다. 부서져서 더욱 아름다운 파도의 하얀 포말에 온몸 던져 출렁이며 출항과 귀항, 만선과 빈 배의 삶을 되풀이하는 어민들 삶과도 잘 어우러져 있다. 이곳을 찾는 여행자가 깊은 사색과 아름다운 깨달음의 공간으로 받아들인 이유다.
등대에 서서 기쁨과 슬픔을 털며 사는 지혜를 터득하고
사실 제주사람들에게 '봉'이라는 이름은 '오름'이라는 말보다 낯설다. 그런 제주 사람들에게 사라봉은 각별하다.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대개 오름인데 등대를 받치고 선 사라봉은 사라봉공원으로 부르며 일상에 즐겨 찾는 명소로 여긴다.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도의 관문인 제주항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편다.
제주항은 항해 선박과 여행객의 만남과 이별이 제일 먼저 이루어지는 곳이다. 제일 먼저 그 마중과 배웅을 절벽 위에서 청사초롱처럼 들고 나서는 이가 하얀 등대다. 산지등대는 그런 기쁨과 슬픔의 파도와 포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서 있었을 것이다.
등대를 울타리 친 돌담길은 돌이 많은 제주문화를 그대로 상징하는 듯 했다. 풋풋한 시골 내음과 긴 세월 갯바람에 나부끼면서 젖어든 제주정서를 표현하는 올레처럼 시내 여러 길에서 오솔길로 나뉘어 등대에 이른다. 등대에 다다르면 마치 고향집 흑백 사진첩처럼 퇴색한 돌담 이끼들과 푸른 화초들이 더불어 제주 역사와 전통의 그늘을 재현해준다.
이곳에서 일하는 등대원은 3명. 크고 작은 해상사고가 빈번한 제주항 일대를 지켜보며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불철주야 긴장한다. 그리고 시나브로 등대를 찾아오는 청소년 체험학습코너와 일반인에게 개방된 일부 숙소를 관리하고 1시간 단위로 해상날씨를 체크해 기상청에 통보한다.
제주공항-제주항-도두항-해녀촌-방파제-카페촌으로 이어진 해안선
▲ 해녀촌에서 자연산 전복죽을 시키면 나오는 여러 종류의 찬거리.
▲ 섬문화연구소 초청, 해녀의 삶을 표현한 '우리할망넨 영 살았수다'(우리 할머니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공연.
등대에서 10여분 승용차로 타고 왼쪽 방향으로 내려가면 도두항이 있다. 도두항은 사라봉보다 작은 65m의 도두봉을 중심으로 해안으로 뻗어 나간다. 봉우리가 낮지만 제주 전경과 제주국제공항에 뜨고 지는 항공기, 제주항과 산지등대, 툭 트인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도두항 주변은 도시근교 전형적 농어촌 풍경의 도두1동 등 4개 자연마을이 형성돼 있다. 제주국제공항과 2만9천여평 공유수면이 매립돼 이어진 포구와 선창, 횟집, 카페들로 해안선은 추억과 낭만의 물결로 출렁인다.
▲ 방파제 등대 사이로 선상 낚시꾼들을 태운 어선이 포말을 일으키며 출항중이다.
▲ 도두봉 아래 어선들이 정박 중인 선착장과 오른쪽 유람선 선착장.
해양경찰서 도두동 출장소와 도두동 주민센터 주변에는 해녀들이 직접 잡은 전복 등 해산물을 요리하는 4~5개의 해녀촌이 있다. 매년 1월 도두봉에서는 해맞이 축제가 열리고 8월에는 도두항 주변에서 민물장어 맨손으로 잡기체험과 소라 한치 말리기 등 수산물 시식과 요리체험 등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해안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면 방파제가 이어진다. 연인들의 산책과 세월을 낚는 강태공, 태왁(해녀들이 물질할 때 사용하는 도구)을 끌고 물질하는 해녀, 수상요트 타는 레저인들, 선상낚시, 유람선을 타는 사람들 저마다 다양한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방파제 주변은 낚시꾼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포인트로 감성돔, 벵에돔, 오징어, 고등어, 볼락, 우럭, 자리돔이 주로 잡힌다. 겨울철에는 벵에돔과 볼락, 학꽁치가 주종이다.
유람선에서 시 읊고, 하모니카 연주, 해녀공연...제주 밤바다 어선들의 조업풍경
▲ 방파제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고 해안 아래쪽은 낚시꾼들이 몰려든다.
▲ 검은 해안선에 하얀 파도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이 일대 야경은 빼놓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이다. 섬문화연구소는 해상 유람선에서 캠프를 연 적이 있다. 노을이 지자 전국에서 모여든 70여명의 시인과 일반 캠프참가들이 촛불 시낭송을 하고 특별히 초청한 제주 민요공연단의 '우리할망넨 영 살았수다'(우리 할머니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해녀공연을 감상하기도 했다.
노을이 지고 밤이 깊어가면서 준비해간 하모니카, 오카리나, 통기타 연주를 들으며 선상 밖으로는 오징어와 갈치를 잡는 어선들의 출항과 조업을 구경했다. 방파제 가로등 불빛과 점점이 이어지는 어선들 불빛 속에 간간이 부서지는 파도소리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가 밤바다 여행의 최고 절정을 만끽하게 했다.
그런 아름다운 제주 밤바다를 아늑하게 비추는 것은 사라봉 언덕배기 산지등대 불빛이었다. 여행길에서는 문득 우리 눈에 새로 발견하는 것과 그것을 보이게 해주는 또 다른 헌신의 가치를 발견하곤 한다. 그것이 자연이 주는 여백의 공간이다. 여백 때문에 내가 빛나듯이, 섬과 바다는 서로가 수평으로 출렁이는 것을 본다. 섬여행에서 얻는 진정한 지혜와 깨달음의 순간이다.
▲ 해녀촌에서 도두항 방파제로 나가는 길. 바닷물이 도두항 마을 중심까지 드나든다.
○ 산지 등대로 가는 길
1. 제주국제공항(300번 시내버스)→제주여상→산지등대
2. 제주여객선터미널→산지등대
3. 제주항에서 도보 이동, 차량으로 등대 앞까지 진입가능
4. 한여름, 겨울철(성수기) 찾는 이가 많아 제주항에서 택시 이동시 10여분 소요
5. 문의: 산지항로표지관리소(064-722-5707)
6. 제주행 배편
- 부산→제주 주3회(화,목,토) 코지아일랜드 주3회(월,수,금)/인천→제주 주3회(월,수,금) / 목포→제주 1일 1회/여수(녹동)→제주 1일 1회/완도→제주 1일 2회(3시간 20분 소요) 1일 1회 온바다훼리1(5시간 소요)
- 배편문의: 제주항(064-757-0117) 부산항(051-660-0117) 인천항(032-700-2223) 목포항(061-243-0116~7) 여수항(061-663-0116) 완도항(061-552-0116)
▲ 제주항 밤바다 유람선과 오징어와 갈치를 잡는 어선들의 불빛
○ 섬여행 TIP
1. 등대체험 프로그램은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여수 거문도등대, 부산 가덕도등대, 제주 산지등대에서 운영 중이다. 신청 방법은 해당 항만청 홈페이지 신청란에서 가능하다. 2. 제주 산지등대는 제주해양관리단 홈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내려 받아 팩스로 신청한다. 숙박 예정일 16일 전에 신청하고 신청자가 많을 경우는 초중고 가족동반, 60세 이상 노부모 동반가족, 현지 거주자 순으로 결정한다. 깔끔한 펜션 형태로 두 가족 정도가 편안하게 머물 공간과 섬과 바다를 조망할 수 포인트에 위치한다.
3. 섬여행이라면 배를 타고 3면이 바다인 반도국가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추억 중 하나이다. 오랜 시간 소요되는 특성을 활용하여 선실에서 다양한 프로그램 감상, 편안한 휴식, 경비 절감 등 장점도 있다.
4. 제주항까지 자동차를 가지고 갈 수도 있다. 인천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선적비는 차종에 따라 8만원~25만원대) 완도여객선터미널(6만7천원~14만원대) 목포여객선터미널(8만원~18만원대) 여수여객선터미널(9만원~18만원대) 부산여객선터미널(9만원~20만원대) 통영여객터미널(7만원~16만원대)
5. 지금까지 배편 이용시 일반객실의 경우 오픈된 형태로 남녀 구별없이 이용하는 불편함이 있었으나 오리엔트스타2호 등 일부 여객선이 여성전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6. 제주유람선(승선인원, 350명. 세미나실, 120석 연회장, 레스토랑, 야외테라스)
- 선상야경 코스는 도두항→해안도로→용두암→탑동→도두항(1시간 10분소요)
- 운항시간(하절기 11:00, 14:00, 17:00, 19:00, 20:30, 동절기 11:00, 14:00, 17:00, 19:00). 문의(064-726-0086)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섬(www.sumlove.co.kr)에도 실렸습니다. 필자 박상건은 시인이고 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최근 언제 떠나도 좋은 섬 45개를 선정해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을 출간했습니다.
박상건의 [명품 해안선 트레킹] 제주 숨은 비경 ‘함담해안산책로’ (0) | 2017.10.11 |
---|---|
우도 등대 아래 해녀 (0) | 2011.08.13 |
분화구와 무인등대 우뚝 선 비양도 (0) | 2007.08.03 |
등대 아래서 하모니카 연주하고 시를 읊조리고.... (0) | 2007.07.25 |
해안선만큼 곡절 많은 우도와 등대지기 이야기 (0) | 2007.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