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신문은 예전보다 두툼해졌지만 감동은 덜하다. 그 시절 4면이나 8면짜리 신문 잉크 냄새에는 휴머니즘이 묻어났다. 사노라면 힘든 여정, 자아를 잊어버리곤 한다. 그때 문득 글 한구절을 만나 생각을 고쳐 세운다. 히포크라테스의 ‘아포리즘’ 첫머리에 나오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짤막한 글이 아포리즘(Aphorism)의 시초이다. 살면서 외롭고 힘들 때마다 나를 다독이는 금언, 격언, 경구, 잠언 등의 아포리즘은 체험에서 터득한 진리의 응축이다.
신문을 죄다 공자 말씀으로 채울 수만은 없다. 그러나 휴머니즘적인 담론과 인터뷰 기사는 살며시 미소 짓고 눈물 흘리게 한다. 휴머니즘(Humanism:인본주의)은 600년 전 권위주의에 질식돼 가던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문예부흥운동이었다. 학자들은 1세기 건너 새로운 휴머니즘에 관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일’,‘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뉴휴머니즘(Neuhumanismus)’…. 긴긴 연구에서‘인간다움’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인간다움’은 영원불변의 진리이다.
휴머니즘 구현에 굳이 사람이 소재일 필요는 없다. 한 줄 기사, 한 컷 포토저널리즘을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다르다. 소한, 대한 등이 왔을 때 애써 웅크린 출·퇴근길 시민을 담아낸 기사보다, 붕어빵과 팥죽집 겨울풍경 스케치 기사는 따뜻하고 정겹다. 권투선수 사망사건 기사에 비해 6명의 생명을 되살린 장기기증 복서이야기가 더 휴머니즘적이다.
이는 보도기호학에서 기표에 따라 기의(의미)가 달라진다는 이론과도 일치한다. 사건 지향의 기자에게 겨울 숲에 두 동강 난 나무는 기사소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루터기는 긴 세월 그을린 나이테에 풀꽃 하나씩 키운다. 재생의 상징이다. 한뼘씩 새 생명을 키우면서 작은 식물과 눈높이를 맞춘다. 겸허와 배려이다. 부르튼 껍질은 곤충의 터전으로 내주고, 생채기 도려낸 틈새를 자연산 버섯의 겨울보금자리로 내준다. 자기희생과 모성애이다. 한컷 포토저널리즘이 아름다운 아포리즘을 얼마든지 구현한다. 그 한 컷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며 봄을 기다리는 서민의 풍경을 반추한다.
물론 신문에는 미담기사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 명절이나 연말에 치중된다. 틀에 박힌 기사 프레임은 대기업 총수나 정치권력 홍보이벤트 지면으로 둔갑하길 되풀이한다. 동정과 미담 기사 주어는 5% 상층권력이다. 사람과 사건 등에 대한 지면편중은 권력지향의 뉴스패러다임으로 굳어져 정치권력 일정표를 안내하는 식이다. 출입처 중심의 취재망 탓이기도 하지만, 미디어는 이성과 합리성이 중요하다는 맹신 때문이기도 하다.
각지고 팍팍한 세상일수록 감성 교류로 서로 위안이 되는 작고 나지막하며 아기자기한 서민의 이야기가 믿음직스럽고 정겹다. 그래서 뉴스의 이성과 감성 등은 대조적 개념이 아니라 조화로운 정반합(正反合)의 관계이다. 새해는 미디어 창(窓)에서 이런 지도자들의 풍경을 보고 싶다. 후미진 달동네 언덕배기에서 새벽을 여는 미화원과 땀방울 흘리며 우동 한 그릇을 함께 먹는 대통령, 총리·장관·도지사·시장·군수의 이야기. 혹은 벌판에서, 집어등 불빛 아래에서 그물질하는 민초들과 한사발로 목을 축이는 다정하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 말이다.
숨 가쁜 산업정보화와 경쟁 지상주의시대에 감성이 사라지면 감동도 사라진다. 그 빈 자리에 불신과 분노, 분열과 허무 등만 꿈틀댄다. 5% 상층부를 지탱하는 것은 95% 개미인생이다. 그 에너지가 오늘의 역사를 추동하고 문화를 작동하는 원천이다. 인간은 감탄과 희망과 사랑 등으로 산다. 민초의 꿈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세상으로 길목에 언론의 진정한 등대지기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해 무엇하랴.
박상건(섬문화연구소장·신문발전위원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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