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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떠나야할 시간

섬과 문학기행/붓가는대로 쓴 글

by 한방울 2007. 12. 1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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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간다. 뒤돌아보면 걸어온 길들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수많은 발자국에서 기쁨과 슬픔을 반반씩이 버무린 얼굴들, 버거운 삶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 기꺼이 손 길 내밀던 사람들. 그 얼굴들이 녹슨 낙엽으로 나뒹군다. 인연이란 귀한 것이어서, 마지막 한 장까지도 바람 찬 겨울거리에서 저렇게 나부끼는 것일까.

 

 

매년 이맘때면 두 물줄기 서로 머리 맞대어 흐르는 두물머리를 찾는다. 작은 카페에서 두툼한 카드 뭉치를 풀어 놓고 그리운 얼굴들을 호명하며 감사의 편지를 쓴다. 초등학교 이후 여태 버리지 못한 버릇 하나가 편지 쓰기이다. 꾹꾹 눌러쓴 친필과 따뜻한 침을 발라 붙인 한 장의 우표에서 전이되는 온기의 의미, 그것을 이심전심으로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밑의 멋과 맛을 모르리라.

 

거칠고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흐르는 강물에 나를 반추하는 일. 각지고 힘겨운 시대일수록 삶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깨달음의 시간은 참으로 고귀하다. 저녁 무렵 모락모락 피어나는 강촌의 연기는 때로 눈물 나게 한다. 정직한 농부의 땀방울만큼이나 아궁이에서 작렬하게 타오르는 장작불의 의미를 되새김질시킨다. 아랫목 뜨겁게 지핀 후에 한 그릇의 실가리국으로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한 끼의 밥을 말아먹던 안빈낙도의 겨울농촌 풍경.

 

불타는 장작불에서는 다비식 때 노스님의 경건함마저 묻어난다. 문득, 옛 고향집이나 조무래기의 추억 혹은 그런 상념에 젖는다. 마른 장작도 한 때는 신록의 잎사귀로 바람을 퍼 올리며 저 들판을 흔들 수 있을 때까지 온몸으로 흔들었을 것이다. 덧없는 세월에 엽록소는 빈혈의 단풍잎이 되고 노쇠한 낙엽으로 쓸쓸한 겨울거리를 나뒹군다. 그러나 낙엽의 최후는 나지막이 흐르는 강물에 제 몸을 던졌다는 사실이다.

 

 

 

아궁이의 장작불은 생목에 대한 기억의 춤사위이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렇게 따뜻한 군불을 지펴주는 일이다. 마른 장작이 ‘타닥’ ‘탁탁’ 타들어가는 것처럼 푸른 이끼를 겨울옷 삼아 갈아입은 겨울 숲은 다시 위대한 생명의 허파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고목이나 아름드리나무에서는 지극한 모성애를 발견한다. 사골 국물을 우려서 자식들의 시장기를 채우던 어머니는 결국 사골 뼈처럼 야위어 간다. 그런 생의 그림자를 좇는 사이에 한 그루의 고목 아래 가부좌한 그루터기의 일생을 보았다.

 

동안거에 들어간 노스님처럼 앉은 채로 나이테를 뒤돌아보며 겨울나기 하는 그루터기. 제 몸 다 베어주고도 다시 풀잎이며 벌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저 자애로움이여. 그루터기는 삶이란 위로만 향하는 길이 아님을 웅변한다. 산길은 내려오고 강물은 아래로 흐르는데 왜 인간의 탐욕만이 위로 향하느냐고 반문한다. 모든 사물은 위에 있을 때 가장 불안하다.

 

거짓과 부패, 우격다짐으로 얼룩지고 아우성치는 정치판의 탐욕 앞에서 소시민 가장들의 세밑 어깨는 저린다. 가슴 짓누르는 분노와 절망이 그루터기에 박힌 생채기처럼 서릿발에 젖어 있다. 그러나 행복은 만드는 것이다. 그 행복은 잊었기에 오는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했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무심히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바다에 이를 일이다. 태안반도에서, 강화도 석모도에서 사람들은 일출에 환호하면서 노을에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무는 일은 나를 쓸어내리는 겸허한 제례이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세밑과 대선정국에다 삶의 무거운 짐까지 짊어진 채로 고지대 막힌 수도꼭지처럼 가슴앓이의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조상이 그랬듯이 세밑에는 시간의 여행을 떠나자. 버리고 비우기 위한 아름다운 여정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여백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동행을 권할 빈 의자가 필요하다. 여백에 새해 새아침의 햇살이 쨍그랑 쨍그랑 부서지고 빗발칠 것이다. 이제 새해 새로운 날은 그대 젖은 가슴을 쨍그랑 대는 햇살로 당당하고 여유롭게 맞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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