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길
토요일이나 방학이면 늘 바다가 보이는 할머니 댁으로 갔다. 읍네에서 30분이면 족했다. 시골버스는 “오라~~이” 소리와 함께 차체를 툭툭 치면서 반사적으로 출발했다. 만원버스에 아직 올라타지 못한 승객들도 반사적으로 덜 닫힌 출입문에 한쪽 팔과 다리를 걸친 채 버스와 한통속으로 신작로의 바람을 갈랐다. 지게 진 할아버지나 송아지가 음메~하며 도로에 출현이라도 하면 급브레이크가 걸렸고, 앞 손님들은 저절로 밀려 콩나물시루 사람들은 차곡차곡 쟁여지곤 했다.
때로 시골 사람들은 일부러 급브레이크를 밟았다며 운전사에게 투덜대기도 했지만, 이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버스는 흔들리며 꼬부랑길을 넘어갔다. 그 길 아래는 파도치는 바다가 보였다. 통학버스가 굴러 몇 번씩이나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열 두 구비의 이 섬 모롱이를 무사히 운전하는 모습이 하도 신기해 한 때는 운전가 되는 게 꿈이었고 먼 바다를 미끄러지는 이름모를 원양어선을 바라보며 마도로스를 꿈꾸기도 했다.
시골 유년시절의 맛본 추억 몇 토막
그러던 어느 날 만원버스 출입문에 소년의 손이 끼인지도 모르고 안내원 누나는 “오라~이”를 외치며 온몸을 던져 출입문을 잡아당겼다. 여덟 살 소년은 누가 볼세라 어금니를 꽉 물고서 눈물만 펑펑 쏟았다. 안내원은 피가 줄줄 흘리는 소년의 손가락을 바라보고서야 붉은 손수건을 꺼내 감싸 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던 안내원 누나는 이제 중년의 아낙이 되어 시댁으로 설 마중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혹을 넘긴 그 소년은 잠시 그 시절 아로새긴 추억의 흉터를 바라보며 남녘 고향의 파도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사립문 열어 제치는 소리는 자동으로 초인종 소리가 되어 늘상 토방을 맨발로 뛰쳐나와 “아이구~ 내 새끼야~”하며 끌어안던 할머니. 작은 방의 큰 고모 작은 고모도 일제히 뛰쳐나와 조카를 꽉 껴안곤 했다. 평상 위에서 여름나기를 했고 밀죽을 먹고 잠든 조카에게 달려다는 모기를 쫓기 위해 모기장을 치고 부채질을 하며 총총 뜬 밤하늘을 일러 문학 처녀의 진수를 보여주곤 하던 고모들. 이웃집 잔칫날이면 떡과 과일을 수건에 싸와 건네고 텃밭의 쑥갓이며 마을 종지를 따다 오일장에 팔아 고무신을 사주시곤 하시던 할머니.
까치밥도 다 떨어진 겨울이면 할아버지는 툇마루 선반 위에 아껴 놓은 홍시를 내어 주었다. 할아버지가 소를 몰고 들판으로 나가면 슬금슬금 마루로 들어가 꼿발 서서 선반을 뒤적이다가 “와장창창~~”그릇이 깨지고 오일장에 내다 팔 깨와 콩이 쏟아지고...그렇게 맨날 착한 손주로만 보이려 애썼던 소년의 정체(?)가 탄로 난 것이 마냥 부끄러워 모탕(나무를 모아 둔 곳) 장작더미에 기대어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유년 시절.
벼 베기 철에 새참 심부름 가다가 풀밭에 개구리 쫓다가 막걸리 주전자며 포기김치 논두렁에 쏟아놓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차에 “새참이 왜 이리 늦게 오느냐?”는 품앗이 온 사람들 성화에 못 이겨 총총 걸음으로 집으로 오던 어머님에게 들켜 혼쭐나던 시절도 있었다. 그 논 위에 선산이 있다. 두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다. 할아버지 그물코 엮던 그 바닷가, 삼촌과 함께 망둥어 낚시하던 그 바다, 뻘밭에 배때기 깔며 썰매놀이하다가 두 눈 크게 뜨고 참게 한 마리와 눈 마주치던 개구쟁이 같은 그 바다, 개구리 뒷다리 벗겨 막대기에 꿰매 갯바위 틈에서 참게를 낚아 올리던 그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 두 분은 잠들어 계신다. 얼마 전 그 추억의 삼촌도 환갑을 넘기며 이승을 떠났다.
고향을 향한 농어민들의 후예들....
그 적막한 고향을 향한다. 지금은 만원 버스 대신에 머나 먼 고향 길에서 고행을 한다. 평소에 서울에서 완도까지 6시간 걸리던 길이 명절이면 몇 곱절을 더 넘겨서야 도착한다. 만원버스 대신 마이카 시대를 구가하는 농어민 후예들이 타고 온 차량들이 북적이면서 북적인 만큼 시골 길은 더디게 다가선다. 더디게, 더디게, 다가서는 고향은 그만큼 그리움의 깊이를 더한다. 고향은 늘 그리워하는 대상이. 멀어서 더욱 그립고 동구 밖을 떠나면서 자꾸 뒤돌아보면서 서로 손을 흔들며 물결치는 묘한 그리움의 힘이 물결쳐오곤 한다. 서로 떠날 때마다 짠해서 눈물나는 곳이다. 탯줄 묻어 있고 살붙이가 살아있거나 묻어 있고 그런 저런 이야기는 늘 모자란 채로 남아 있다. 아등바등 살면서 켜켜이 쌓인 절망과 아쉬움과 슬픔과 이별들이 그리움의 이름으로 울어 썩어서 봄을 기다리는 흙무더기의 살이 되는 두엄더미처럼 남아 있다. 무어라 잘라서 말할 수 없는 많은 사연과 얼굴들이 무지개처럼 떴다가 바람처럼 물결처럼 흐느끼고 출렁이다 이내 머무는 곳. 그곳이 고향이다. 고향은 그리움의 산이요, 바다이다.
고향은 그런 곳이다. 고향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을 보면 아무에게나 편지 한 장 건네주어도 통할 것만 같다. 수신인의 주소가 ‘고향’으로 통하는 사람들. 고향은 인간들에게 그런 동일성을 갖게 한다. 구름처럼 강물처럼 도로에 긴 행렬로 흘러가는 차창 안의 사람들이 모천을 돌아가는 연어 떼가 같다. 그러면서 내 고단한 만큼 쉬엄쉬엄 쉬었다가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디선가 꼭 한번은 마주쳤을 것만 같은 고향 사람들의 모습들이다. 서로가 낯설지 않은 것은 고향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이 같은 탓이다. 고향은 단지 태어난 곳만이 아니라 외롭고 쓸쓸하고 그리울 때마다 그리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향 같은 곳이다.
그렇게 더디게, 더디게 가는 길이지만 아궁이에 군불 지피다가 마당으로 나와 감나무 아래서 텃밭 담장 너머에서 신작로 버스 브레이크 파열음만 나도 귀를 쫑긋대고 아스라한 구름처럼 눈 지그시 그만그만한 손주 녀석들의 얼굴을 찾아 해매는 설레임과 기다림이 풀잎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렇게 고향은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모티브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흘러가 만나는 곳이다. 강물이 흘러 흘러가 바다에 이르듯이. 이 땅의 살붙이들은 서로가 하나로 만나 하나로 감동한다. 사랑과 혈육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렇게 명절이면 환유하는 또 하나 삶의 길모퉁이를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움에 사무쳐 섬으로 찾아간 사람들
완도는 서울에서 승용차로 당도할 수 있는 곳이다. 1968년 철거한 한강 인도교가 해남반도와 완도를 잇는 ‘완도교’라는 다리로 이어졌다. 이후 왕복차선이 깔린 연륙교로 산뜻하게 태어났지만 멀기는 마찬가지이다. 해남 땅끝 마을을 30분 더 지나서 당도하는 곳이다. 완도에 부속된 작은 섬들만도 201개. 고금도, 노화도, 소화도, 청산도, 보길도, 약산도, 생일도 등등 이들 섬사람들은 다시 완도에서 배를 타고 고향 섬으로 건너간다. 남해안과 서해안 부속 섬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게 명절마다 고향으로 건너고 또 건너가는 삶을 산다. 포구에 주의보라도 내려 깃발이 올라가면 고향 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되돌아서기도 한다. 자연에 모든 것을 저당 잡힌 섬사람의 운명이다. 산업화 일상 속에서 군중 속의 고독한 섬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이라지만 그 현대인들의 절대적인 상징인 섬을 고향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보다도 절대고독의 의미를 깊게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래서 섬사람들은 산이 있어 산에 오르듯이, 섬이 있어 섬으로 가는 것이다. 단지 고향이기 때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파도가 울타리를 치고 사립문이 되어주는 그 섬을 찾아서. 연어 떼들은 이번 귀향길에도 그렇게 그립고 사무친 모천의 섬에 당도할 것이다.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사진- 완도 불목항에서 작은 섬 고마도로 가기 위해 사선을 타는 귀향가족)
흙내음 풀내음 물소리와 함께 자연에 살으리랏다 (0) | 2004.10.28 |
---|---|
가을과 고향 사이 (0) | 2004.09.23 |
쌀농사 짓는 땅끝마을 황산벌을 찾아서 (0) | 2004.07.27 |
가덕도 등대의 아름다운 등대원들 (0) | 2004.02.12 |
가사도 등대지기를 만나고 (0) | 2004.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