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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가 사형과 새튼 교수의 이기주의가 말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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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방울 2005. 12. 1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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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가와 흑인의 삶을 처단하는 미국문화와 새튼교수가 남긴 것

미국의 ‘합리성’을 버리고 한국인의 ‘통정성’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반폭력 운동가로 변신해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르며 새로운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51세의 스탠리 투키 윌리엄스가 결국 13일 0시3분(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 인근 교도소에서 독극물 주사로 사형됐다. 그 시간 교도소 밖에서는 인권운동가 잭슨 목사를 비롯하여 인권단체 회원 등 수천 명의 시민들이 성조기를 불태우며 사형집행에 반발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형 전까지 5만여 명의 시민들은 사형만은 말아달라며 청원서를 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청원을 받아들일 만한 정당성을 찾지 못했다.”며 사형을 집행했다. 세계적으로 사형 반대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캘리포니아주는 1978년 이래 12번째 사형수로 윌리엄스를 택한 것이다.


왜 태평양 넘어 나라의 사형집행 소식이 한국인의 가슴 아린 이야기로 다가서는 것일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윌리엄스는 흑인이다. 1971년 고교 때 친구들과 폭력조직 활동을 했고 5년 후에는 모텔 직원 일가족 3명과 편의점 직원 1명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 죄값으로 24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우침은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폭력조직을 멀리할 것을 촉구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을 위한 저술 활동도 했다. 이런 애증의 삶이 알려지면서 올해까지 5회 연속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게 되었고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결국 숱한 구명운동은 그를 살려내는데 실패했다. 그를 구원하고자 한 사람들은 사람을 죽인 점은 분명하기에 사형집행이 정당하다는 ‘정당성’ 보다 그 의미부여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 ‘정당성’이라는 것은 결국은 서구 미국사회의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다.


사형집행을 더욱 가슴 아프게 하는 또 하나는 흑인 사회가 통절하게 외마디 비명을 질러야했던 뉴올리안즈 아픔을 떠 올려주기 때문이다. 사망자와 실종자의 수가 1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던 이 지역 역시 흑인들의 주거지였다. 자본주의 강대국을 자처하는 미국에서 가난한 노동자와 민중들이 재앙 앞에서 쩔쩔매며 홀로서기를 하던 모습은 세계 평화를 외치면서 중동 전쟁을 주도하는 ‘이중성’으로 다가온 것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동안에 휴가를 즐기던 미국 대통령과 행정부 관료들의 딴전 피우기는 ‘합리성’을 무기로 살아온 사람들의 권력자본주의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백인들이 아우성을 쳐도 그렇게 허리케인이 덮치도록 방치했을까? 한국전쟁과 월남전쟁 때 막판 적들의 포화 속에서도 자국의 군인과 공관 직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비행기와 헬기를 동원해 수송하던 모습과는 퍽이나 대조적이었다.


알고 보면 재앙은 순식간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대안이 있을 수 있고 차마 대처하지 못한 경우 차선의 대책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2001년 12월 1일자 <휴스턴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가 “뉴올리안즈가 가라앉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예고된 허리케인 앞에서, 그리고 폭삭 주저 않은 백성 앞에서 “정부는 잘하고 있다”고는 말만 되풀이했을까.

허리케인이 오기 전에 왜 미국 정부는 주 정부의 홍수대책 예산 140억 달러 비용을 12억 달러로 낮추도록 압력을 가했을까. 그리고 지원금은 왜 고작 3억7천5백만 달러만 주었을까.

뉴올리안즈의 경우 인구의 67% 이상이 흑인이다. 흑인의 3분의 1 이상이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 흑인들은 미 정부 행정 드라이브에 계산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재해가 나면 혹은 연말이면 온정주의가 밀려드는 한국인의 정서에서는 좀체 이해하기 힘든 문제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릴 적부터 배워온 선진국형 합리성, 미국의 합리성의 빛과 그림자가 무엇인지, 즉 합리성의 허구가 무엇인지를 요즈음 미국의 모습에서 너무나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흑인 인권 운동가를 사형을 집행한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청원을 받아들일 만한 정당성을 찾지 못했다.”며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 정당성은 합리성의 또 다른 표현이다.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재해대책회의에서 “역사상 가장 지독한 자연재해를 다루고 있으며 복구하는데 수년이 걸릴 것이다....이번 허리케인이 유전과 휘발유 생산 시설에 엄청난 피해를 줬음을 이해해야한다...에너지부에 정유업체들의 원유 부족 현상을 메울 방안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생명과 에너지 가운데 에너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은 충격적인 권력자본주의 빛과 그림자를 보게 한다.


뉴올리안즈는 흑인노예제도가 성행한 이래 재즈 음악이 30년 이상 성행해온 곳이다. 흑인영가, 블루스, 노동요 등으로 통해온 재즈는 미국민요에 유럽의 민요, 군악의 기법을 첨가하면서 독특한 장르의 음악으로 자리 잡아 왔다. 어쩜 뉴올리안즈 사람들은 음악이라는 낙천성을 통해 고단한 삶을 극복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가무에 능한 자연주의적 가락으로 농경문화를 근간으로 희로애락을 표현해온 동양인의 낙천성, 한국인의 정서를 빼 닮은 대목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피츠버그대학 새튼 교수는 “12일 <사이언스>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올해 황우석 박사 논문에서 철회해달라고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논문의 제1저자인 황 박사와 다른 공저자 모두에게 논문을 철회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 역시 미국인들의 ‘합리성’의 이면을 확인시켜 준다. 한국인의 정서로는 의리라도 손곱만큼도 없고 배은망덕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도덕시간부터 멸사봉공(滅私奉公)을 통해 공동체 문화를 키워온 한국인의 정서에서 보면 새튼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부도덕한 지식인이다.


이러한 이중성을 서구사상에서는 ‘합리성’이라는 명분으로 치장해왔다. 이러한 근거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 저널리즘 이론이기도 하다. 보도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황우석 논쟁 중심에서 보여준 우리 언론의 모습 역시 이런 중심사상의 답습을 반복했다. 합리적 보도의 폐단은 육하원칙에 따라 모든 것을 사실과 사건 위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런 글쓰기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여 독자들에게 줄서기를 강요한다. 사회적 담론은 흑백논쟁만 난무한다. 합리적 글쓰기는 정서적 건조함을 전이시킨다. 내 생각과 내 생활 습성과 거리가 먼 합리성의 프레임은 그래서 일상생활과 거리가 아주 멀다.


그래서 감동도 없다.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이다. 지극히 계몽적이고 권위주의적이다. 그래서 수용자를 피동적 소구로 만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 선언 이후 서양철학은 인간을 합리성 도구로 전락시켰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자연과 대상을 수량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성(reason)이란 말의 어원은 ‘계산한다(calculate)’이다. 계산하는 사람은 양분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계산하기 좋아하고 협상에 능하다.


이런 이성주의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서양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우리는 그것을 서구적 사상으로 배워왔다. 서구인들은 이를 근거로 문명을 발전시키고 새뮤얼 헌팅턴의 주장처럼 세계의 곳곳에서 문명충돌을 일으키며 ‘합리적’ 기술 사회를 건설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성공의 이면에는 자연의 약탈과 파괴, 언어에 의한 실체의 대치, 인간소외라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그들만의 패권주의적 제국주의로 인해 사람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의사소통마저 왜곡되어 온 것이다. 인간은 의사소통을 통해 한 가족, 한 사회를 이루고 한 국가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의사소통이 감성적인 측면이 무시되고 이성적 효율성만 강조될 경우  정서는 분리되고 양분된다. 그런 의사소통 구조에서는 감동이 없다. 감동이 없는 사회는 삭막하다.


알고 보면 1인 미디어 중심으로 인터넷이 급속히 대중화된 이유 중의 하나도 선택받은 기자와 지식인 중심의 합리적 글쓰기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 생각을 내 문체로 쓰고 전달하는 즉각적 쌍방향커뮤니케이션이 인터넷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정서를 ‘통정성(通情性)’이라고 한다. 즉 인터넷은 우리 인간이 바라고 의사소통하고자 하는 철학, 심리학, 문학, 자연주의적 요소 등을 담아내는 다양한 소재를 일상의 문제와 연결하여 일상 속에서 토로하는 글쓰기와 영상편집이 가능해진 것이다. 데스킹과 의제설정이 자유로운 것이다. 그 바탕에 ‘通情性’이라는 정서가 있다. 경계 없는 감성적 글쓰기, 감성커뮤니케이션이라는 무한공간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앞서 발달한 미국이면서 그들이 ‘문명의 충돌’에서 업신여긴 중국의 부속국가라는 한국의 인터넷 문화와 IT문화에 뒤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선천적인 손가락 문화와 천부적인 자연중심의 감성 커뮤니케이션만은 합리적인 생활방식과 이데올로기로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제는 합리성을 가장한 극단적 서구문화 특히 미국적 담론에 함몰되지 말자. 서구적 모방을 선진 학문인양 선진 기술인양 치켜세우는 우를 범하지 말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동양적인 것이며 가장 동양적인 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우리의 정서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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