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 지역축제와 미디어
박상건 서울여대 겸임교수
이따금 유년시절의 쥐불놀이가 그립다. 들불로 쥐도 잡고
잡초도 태우고, 남은 재는 농작물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모두가 풍년을 기원하며 즐기던 농경문화는 그렇게 축제의 기원이 되었다. 누구나
참여해서 이웃의 어깨를 다독이고 외적의 침입에 함께 맞서던 공동체 문화의 근간이었다.
1990년대 들어 자치시대 물결을 타고 급격히
늘어난 지역축제는 자그마치 1200여개에 이른다. 일상의 축제문화를 지향한다는 영국이 650개에 그치는데 비하면, 우리는 양적분석의 모델국가인
셈이다. 문제는 갈수록 전통문화가 퇴색하고 ‘지역경제 마케팅’과 ‘자치단체 선거용 이벤트’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관광부는 지역축제에 매년 100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37개 자치단체에 21억 6000만원을 지원했다. 나머지
76억원은 문화예술진흥원을 통해 지원한다. 또 문예진흥원은 소규모 축제에 1072억원을 지원한다. 다른 부처의 예산과 기업 협찬금, 아웃도어
라이프스타일을 겨냥한 21조원 규모의 레저시장까지 감안하면 축제는 ‘또 하나의 문화’를 넘어 사회와 국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언론재단 카인즈(KINDS)에서 검색한 4월1일부터 5월1일까지 중앙일간지의 축제관련 기사는 1113건이었다. 서울신문의
83건을 비롯해 하루 평균 3~4건의 축제기사가 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남의 잔치상에 재 뿌리지 않는다.”는 온정주의 때문인지,
대부분의 기사는 분석이나 비판적 시각을 찾기 어려운 홍보차원에 머물고 있다.
보도된 축제 명칭만 보아도 안성 봄맞이축제, 전주
문화축제, 인천 벚꽃축제, 안산 거리극축제, 양산 들꽃축제, 부산 등꽃축제, 과천 토요거리축제, 진해 자전거축제, 춘천 마임축제, 대구
거리마임축제, 영양 고추축제, 괴산 고추축제, 서천 주꾸미 축제, 무창포 주꾸미 축제, 군산 주꾸미 축제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들 축제는 다른 지역과 겹치거나 지역 이름을 가리면 차별화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반대로 무주 반딧불축제, 함평
나비축제, 남원 춘향제, 부산 자갈치축제, 보령 머드축제, 강령 젓갈축제, 강진 청자문화제, 하동 야생차축제, 진주 남강 유등축제, 한산
모시축제 등은 지역 접근성과 문화적 의미, 브랜드 효과까지 톡톡히 내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보자. 어느 생태축제를
찾아갔는데 이벤트업체에 의해 붕어빵 찍듯 기획돼 애드벌룬으로 산자락을 가리고 노래자랑과 엿장수 가위소리, 민속주점만 즐비하다면 그것은 되레
환경훼손이 아니겠는가.
실적주의와 수지타산에 급급해 논밭에 금을 그어놓고 비싼 주차료를 받는가 하면, 매점이나 상설판매장을 분양해
바가지가 극성을 부리는 또 하나의 유흥지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공무원은 축제 운영자가 되고 주민들은 교통 안내자로 전락하고 있다면 그것을 어찌
진정한 축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단체장의 정치적 계산으로 자치단체 산하 문화단체가 아직도 단체장 명의로 된 곳이 많다. 무료 및
할인행사를 금지하는 선거법 때문에 예산을 부담한 주민들은 문화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희생양이 되고 있다.
인구 2000여명에
불과한 일본 구기노 농촌은 메밀 농사를 축제로 활용하고 있다. 이 메밀축제에는 연간 100만명의 인파가 모인다. 메밀찐빵, 메밀간장, 메밀어묵,
메밀아이스크림, 메밀떡을 여행객들과 함께 만들고 팔기도 한다.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면 소재지에 우리나라 국립박물관 수준의 메밀 박물관을
운영하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축제날을 ‘홈 커밍데이(Home coming day)’로 삼기도 한다. 외지에 나간 고향사람들이 돌아와
동창회를 열고 축제도 즐긴다. 이제, 우리도 지역주민을 대대로 이어온 문화의 밭을 일구는 축제의 주인이 되게 하자. 문화는 한 사회의 작동
원리이다.
따라서 도농교류,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윤활유로서, 두 수레바퀴를 돌리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영국 처칠 총리는 “힘을
동반하지 않는 문화는 사멸한다.”고 했다.
성공적 축제문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축제가 진정한 문화 작동의
원심력으로서 자리잡도록, 미디어가 조정과 문화적 기능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
2005-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