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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청춘을 찾아가는 가을길

섬과 문학기행/붓가는대로 쓴 글

by 한방울 2005. 9. 3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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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청춘을 찾아가는 가을 길

 



누가 그랬던가, 가을은 철인哲人(철인)만이 즐길 수 있다고. 떨어지는 낙엽에서 삶을 읽을 수 있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낙엽은 낙엽으로 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봄을 잉태하는 밑거름이 된다. 삶고 사랑도 진보와 윤환을 거듭한다. 낙엽은 그런 삶 읽기의 매력 포인트이자 위대한 생명력의 근원이다. 그렇게 우주는 순환한다.


지금 시골의 가을 길에는 이러한 무수한 삶의 기호들이 우리를 뒤돌아보게 하고 있다. 꽃과 나무들에서 피고 지는 것은 단지 낙엽과 바람소리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은유하는 또 다른 깨달음의 터전이다.


그렇게 유수한 세월의 거울이 되어주며 시냇가에서 강가에서 잔잔하게 물소리들이 흐르고 있다. 그러한 풍경을 허공에서 높고 넓게 읽으면서 가을하늘의 구름들이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언덕길 오르다 아이가 내 손을 잡는다/구름 한번 더 쳐다보고 가자/구름이 꽃처럼 피었네

‘바쁘다고 하늘 한번 쳐다보지 않은/나는 부끄러웠다//마을로 들어서다 아이가 또 내 손을 잡는다/“저 초가집 꽃들 좀 봐/꽃이 구름처럼 피었네’/가난도 때로 운치가 있다는 걸 몰랐던/나는 부끄러웠다//아아, 아이가 피고 있다/이 세상에 눈부신 꽃이 있다” - (천양희, ‘꽃피는 아이’)


시골 길에 마주한 풍경은 죄다 한 식구이다. 구름도 초가집에 핀 꽃들도 모두가 한 가족이다. 가난 위에 핀 꽃들은 가난한 자의 위안이며 희망으로 가기 위한 무언의 메시지이다. 그러기에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처럼 꽃은 생명이며 꽃처럼 핀 아이들은 조국의 미래이다. 자연과 인간이 한 호흡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다. 꽃과 생명 그리고 아이가 조화로운 세상. 시골 풍경은 그대로 꿈이 있는 세상이다.


뒤안에 핀 나팔꽃은 늘 바지랑대를 타고 꿈을 키워간다. 그 모습은 연약해 보이지만 자줏빛 꽃은 세상의 숨겨진 비밀이나 꾹꾹 눌러둔 그리움에 물든 리트머스처럼 허공에 피어난다. 어찌 보면 창공을 향해 긴 나팔을 불어제끼는 형상이어서 제 나름의 노래를 간직한 순수하고 소박한 삶과 사랑의 징표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때로 가난한 농가의 그 무슨 이정표라도 되는 양 우리 곁에서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꽃이다.



“주둥이가 넓고 시원스런 나팔꽃도 좁고 답답한 꽃 모가지가 그 밑에서 받쳐주고 있지 않더냐. 나는 나팔꽃 꽃 모가지가 될 수 없으니, 너는 꽃의 몸통쯤 되고 너의 자식들이나 꽃의 주둥이로 키워보려무나. 안돼요, 아버지. 안 된단 말이에요. 왜 내가 나팔꽃 주둥이가 되어야지, 나팔꽃 몸통이 되느냔 말이에요!” -(나태주, ‘나팔꽃’ 중에서)


그렇다. 주둥이는 넓은데 좁은 모가지로 지탱하고 있는 꽃의 모양새는 질곡의 세월을 끈끈하게 지탱하며 그러나 야무지게 해쳐가는 농부들의 땀방울로 젖어든 삶의 이미지로 다가선다. 그래서 가난 때문에 대학에 못가는 아들과 이를 안타까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노래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 보내달라 투덜대며 대어드는 어린 아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신 젊으신 아버지의 애끓는 목소리”처럼 나팔꽃은 가늘게 허공으로 쳐 올라가는 것이다.


허리 굽어진 농부의 등허리에서 늘 함께 거친 숨소리를 들었던 삶의 동반자인 지게가 기댄 담벼락에는 담쟁이가 직각의 길을 기어오르고 있다. 끝끝내, 기어이 가고야 말 그 길을 담쟁이는 천천히 그 길을 처 올라간다. 그 길 또한 농부가 꿋꿋하게 꿈꾸는 희망의 길과 무엇이 다르랴.


삶터에 함께 살아가는 꽃들이 있는가 하면 등하교길에 동무가 되어주던 꽃이 있었으니 바로 코스모스이다. 신작로에서 꽃대궁을 꺾어 듬성듬성 홀잎으로 따내서 허공에 빙글빙글 돌리면서 헬리콥터 놀이를 하며 동구밖으로 돌아오던 조무래기들.

아이들이 잠든 시골의 밤길에 별들이 우수수 꽃무더기에 피어나곤 했다. 평상에 누워 그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유성이 꽃밭으로 뚝, 뚝 지곤 했던 것이다.


“밤마다 유성이 모이는 시골도 학교길에/별 볼 일 많은 아이들은 모두가 코스모스꽃이다/그래서 학교길 가을볕은 한 촉수가 더 밝다/아이들 목소리도 한 옥타브 더 높다” - (유안진, ‘코스모스 학교길’ 중에서)


산정에 풀을 뜯는 암소나 외양간에서 음메~~를 외치던 모습도 우직한 농부의 모습을 닮았다. 요즈음 한 집에 한집 걸러 승용차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이지만 그 시절 소 한 마리는 그 집의 없어서는 운송수단이었고 노동의 동행자였으며 보배였고 상아탑의 상징이었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중략)//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다시 씹어 짓이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김기택, ‘소’ 중에서)


그런 소 한 마리의 눈동자는 그대로 식솔의 눈동자이며 인간의 본성으로 살아 파닥이는 눈빛을 가졌다. 음메~~~를 외치지 않아도 속으로 말하고 속으로 통하는 가족애처럼 소의 눈동자는 우리네 못다 한 속울음이거나 애정의 눈빛으로 다가오곤 했다.


또한 어느 마을에나 정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마을의 수호신이기도 하고 더운 여름 쉼터이기도 했으며 새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오일장에 나간 할머니를 기다리며 먼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시골버스가 어디쯤 오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 나무에 오르곤 했다. 다람쥐처럼 오르던 조무래기들의 추억까지 그 한 그루 나무는 나이테를 빙글빙글 돌리며 농부들의 손등처럼 굳고 벗겨진 껍데기를 온몸에 두른 채로 시골의 역사를 보듬고 서있다.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내 집 뒤에/나무가 하나 있었다//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비를 가려 주고/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그 바람으로 숨으로/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 (류시화, ‘나무’ 전문)


그렇게 마을 어귀에 등 기대고 선 나무는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우리네 삶의 기호이며 잊혀져간 삶의 흔적과 바람을 불러 세워 그리운 얼굴들을 나뭇잎으로 나부끼며 호명하고 재현해주는 상징물이다.


때로 은빛 햇살을 털어내며 빛나고, 때로는 뙤악볕에서 돌아오는 농부들의 땀방울 식혀주는 청정의 그늘이자 새들의 합창을 들려주기도 했다. 햇살 눈부시던 들판에 소낙비가 쏟아지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며 웃으며 비를 긋던 사람들의 행랑채 역할까지 해주었다.


때로 사노라면 힘들고 지칠 때도 있는 법. 그래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그렇게 나무는 가을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사노라면 길 위에는 숱한 외로움과 고독한 그림자가 있음을 안다. 그리고 그리움이 드러누워 있음을. 가을바람은 바람처럼 스쳐가는 세월 속에서 잊혀 질 뻔한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알밤 까듯 꺼내어준다. 그리고 일기장처럼 추억의 앨범처럼 한 장씩 넘기게 해준다. 인생은 한 권의 책인 것을. 가을 길은 그 책장을 넘기면서 한 박자 쉬고 한 옥타브 더 높게 노래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되돌려주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시골길에서 만난 바람들이 그런 흔적들을 바람일게 하면서 지친 영혼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을 길이다. 그렇게 “들길을 간다./노을이 타는 지평을 찾아서/잃어버린 청춘을 찾아서/푸른 바람 설레는 들길을 간다.//(중략)//강을 건너서 숲을 지나서/백합의 뜰에 잠든 시간을 찾아/푸른 바람 설레는 들길을 간다.” - (오세영, ‘들길을 가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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