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박상건의 등대이야기 80] 호미곶 울기등대 1박2일여행

여행과 미디어/여행길 만난 인연

by 한방울 2015. 7. 20. 15:52

본문

[박상건의 섬과 등대이야기 80] 등대에서 세상의 빛을 읽다

국립등대박물관 언론인 초청 1박2일 등대여행

 

 

 

▲ 호미곶 등대에서 장기곶에서 호미곶으로 명칭 변경을 주도했던 영일호미수회장 서상은 회장과 투어 참석 언론인
ⓒ 박상건

 


해양수산부 한국항로표지기술협회(이사장 박찬재)와 국립등대박물관(관장 전성식)은 지난 9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 분야에 종사하는 언론인 20명을 초청해 등대박물관, 호미곶등대, 대왕암, 울기등대 등을 잇는 등대체험프로그램인 해양문화아카데미를 실시했다.

호미곶등대는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221번지에 있다. 호미곶은 포항시 대보면 영일만에 돌출한 곶으로 한반도 호랑이 꼬리 끝자락에 해당한다. 이 해역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 각종 물고기가 회유한다. 그래서 어민들은 주로 정치망 어업을 하고 오징어 꽁치 고등어 김 미역 전복 성게 등 육질 좋고 싱싱한 수산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1903년 6월에 불을 밝힌 최초의 등대 인천 팔미도등대에 이어 호미곶등대는 1908년 12월 영일만 앞 바다에 그렇게 첫 불을 밝혔다. 형상은 한반도 꼬리 모양이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육지의 첫 시발점의 바다일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역사의 파도를 넘고 넘어섰다.

등대 출입문과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의 건축기법인 박공양식으로 장식됐다. 상부는 돔형 지붕 형태에 8각형 평면을 받치고 있다. 하부로 갈수록 점차 넓어지는 형태이다. 층계는 백팔계단으로 주물로 만들었다. 탑 내부 천장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양 오얏꽃이 새겨져 있다.

층마다 이 무늬가 새겨져 있다. 가덕도등대를 비롯 구 등대에서 볼 수 있는 문양들이다. 한국 등대의 역사가 강대국에 의해 설치된 등대임으로 국화를 그릴 수는 없었다.

 

 

▲ 상생의 손과 등대투어 참가자들 호미곶등대 등탑에서 내려다 본 영일만 해변 모습
ⓒ 박상건

 


등대 불빛의 모체는 사랑과 평화

인간은 감탄과 희망과 사랑으로 산다. 등대박물관에서 우리 민족의 해양사, 그 해양사를 온몸으로 써온 마도로스, 섬사람 그리고 그들의 길을 밝혀온 등대원의 아름다운 이이기가 역사즉 증거로 남아 있다. 불은 빛의 모체이고 사랑은 언제나 평화의 모체이다. 등대박물관에서 뜨거워지는 사랑을 느끼면서 참석자들은 잠시 영일만 앞 바다에서 사색에 잠기곤 했다.

박물관 앞 바다에는 화합과 상생의 의미를 담은 '상생의 손'이 있다. 변산반도 천 년대 마지막 햇빛, 피지섬 새천년 첫 햇빛, 호미곶 새천년 첫 햇빛 등 3개의 빛이 합쳐져 안치된 불씨는 각종 국제대회 성화의 씨불로 사용되고 있다. 또 해와 달의 설화 주인공인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금실 좋게 마주한 형상이 영일만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등대투어 참가자들은 첫날밤을 호미곶 작은 포구마을인 강사리에 있는 리조트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한 일행들을 반기는 것도, 고단한 아침에 기지개를 켜는 나그네들을 맞아주는 것도 리조트 앞바다에 서 있는 하얀 방파제 등대불빛이었다. 등대와 함께 이국적인 색감을 연출하는 하얀 리조트는 등대투어 참가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되새김질하기에 충분했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 봉수대와 함께 한 울기등대

다음날 전복죽으로 아침을 먹은 일행들은 울산 12경 중 하나인 대왕암 울기등대로 향했다.
울산 동구 역사는 신호표시 일종인 등대의 역사와 그 맥을 함께 해왔다. 1998년 10월 19일 울산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된 주전봉수대는 옛날 군사통신수단의 하나로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횃불을 통하여 상황에 따라 다섯 가지의 신호로 조정에 보고했다. 이 봉수대는 주전동 봉대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세조 때 세워진 것을 2000년도에 높이 6m 직경 5m의 원통형 석축으로 복원했다.

또 화정천내 봉수대 역시 사방이 잘 보이는 산봉우리에 위치하여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인근 봉수대와 서로 연락하여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과 해당 진영에 알리던 옛날 군사 통신 수단의 하나이다.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제도로서 조선 세종 때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봉수대는 해발 120m인 봉화산 정상에 위치하며 울산만의 관물을 지키는 봉수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리산에서 봉수를 받아 남목천, 현재의 주전으로 전했다.

태백산맥이 마지막 뻗어내려 그 끝자락 깊숙이 들어가 있는 방어진 반도에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해안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제2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울산의 끝단. 거기에 울기등대가 있다. 울기등대 구등탑은 1905년 2월 목재로 만들어진 등간으로 건립되어 방어진항을 유도하는 항로표지로 사용되었다. 1906년3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설치돼 현재의 장소에 높이 9m의 백색 8각형 콘크리트 구조물로 새로 설치돼 1987년 12월12일까지 80여 년간 사용되었다.

 

 

▲ 울기등대 좌측 구 울기등대와 우측 새로운 울기등대....해설사로부터 울기등대 유래에 대해 듣고 있는 투어 참가자들
ⓒ 박상건

 


강대국 이정표 역할을 해온 등대의 아픈 역사

울기등대에 등간이 설치되는 배경에는 청일전쟁 때문이었다.1894년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은 한반도에 등대가 설치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고 우리나라에 등대건설과 해안 측량을 요구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은 등대를 건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1902년 일본의 압력을 받는 대한제국은 관세수입 가운데 20만 원으로 32개소의 등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관세를 담당한 해관(海關)에 등대국을 설치하고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의 4개 등대를 건축하여 1903년 6월 1일 점등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근대식 등대의 시작이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우리나라 서해안과 압록강 하구에 항로표지를 설치했는데 당시 일본 해군은 남해안과 동해안 각각 두 곳에 나무로 길쭉하게 만든 기둥 모양의 등대, 즉 등간을 세웠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울기등대의 기원인 울기등간이다. 울기등간이 세워진 곳은 원래 조선시대 목장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이곳을 일명 울산목장 또는 방어진목장이라고 불렀다. 1894년 목장제도가 폐지되면서 국유지로 남아 있던 이곳에 일본 해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등간을 설치하면서 울기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울기등대 건립은 1905년 2월 20일이다. 그러나 공식기록에는 1906년 3월 26일이다. 1905년 9월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의 각종 등대의 관리를 대한제국으로 넘겼다. 대한제국은 1906년 3월에 해관 등대국을 세관공사부 등대국으로 관제를 개편하고 5개년 계속사업으로 등대를 새로 건립하거나 러일전쟁 중에 급하게 설치된 등간, 등표 등을 고쳐 짓기 시작했다. 관청 주체가 바뀌면서 빚어진 일이다. 여전히 기술자는 일본인과 체신성 항로표지관리소 현직 관리들이 맡았다.

 

 

▲ 대왕암 숲길 울기등대 아래 대왕암 숲길. 사시사철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 숲길을 찾는다.
ⓒ 박상건

 


방어진 밝히던 등대, 이제 울산시민의 희망의 빛

그렇게 등장한 울기등대 불빛 아래서 일제 강점기 때 울산의 방어진항은 성어기에 매월 600~700척의 어선과 3천~4천 명의 어부가 드나들 정도로 번성했고 포경업도 더불어 발달했다. 당시 등대는 그들의 삶과 함께 했고 등대 건축양식 또한 구한말 시대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당시 건축기술과 기법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106호 지정됐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해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인공적으로 1만 5천 그루의 해송림이 조성되었다. 그 후 등대 주변의 해송들이 자라 하늘을 감싸 안아 등대불이 보이지 않게 되자 1987년 12월 기존 위치에서 50m 옮겨 촛대모양의 아름다운 등대를 새로 건립하여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대왕암공원에 등대가 위치하여 등대로 가는 600m의 길섶에는 타래붓꽃, 수선화, 해당화, 해국 등 각종 야생화가 만발한다. 매년 4월이면 왕벚나무 터널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원래 울기의 한자어 뜻인 '울산의 끝'이라는 뜻의 울기(蔚崎)를 사용하다가 2005년 8월 10일 문화부가 주관하는 광복 60주년 기념 문화사업추진위원회 '광복60년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할 일제문화잔재 시민제안 공모'에서 울기등대 명칭이 일제 문화잔재로 선정돼 변경 의견이 대두되면서 점등 100주년을 맞아 울기(蔚氣)로 변경하게 되었다.

현재 신등탑은 24.7m 높이에서 등명기 750mm 회전식으로 10초마다 한 번씩 반짝인다. 불빛이 가 닿는 거리는 48km에 이른다. 2004년 12월 등대 종합정비 및 친수문화공간으로 조성돼 등대체험 프로그램이 매우 활성화 되어 있는 등대이다. 연간 30만 명이 등대를 찾는다. 등대체험은 등대시설 견학, 등대원 제복을 입고 기념사진 촬영, 홍보영상물 교육, 해안둘레길 걷기, 시낭송, 음악동호회 공연, 어린이 장기자랑대회, 야외결혼식, 국악공연 등 매우 다양하다.

울기등대는 무인화 신세가 된 화암추 등대를 원격 조정하면서 우리나라 동해안 최초의 등대로서 선박들을 안전하게 안내할 뿐 아니라, 울창한 송림이 우거진 대왕암공원 가장자리에 우뚝 서서 울산시민과 호흡하면서 365일 등대와 바다를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아름답고 든든한 등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대왕암 해안도로 울기등대 아래 위치한 대왕암 숲길은 해변을 끼고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 박상건

 

덧붙이는 글 | 박상건 기자는 시인, 섬여행 칼럼니스트, 사단법인 섬문화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 바다 섬을 품다, 포구의 아침, 등대이야기, 등대로 가는 길 등 다수가 있다.

 

* 이 글은 오미이뉴스(2015.07.14)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6877

 

* 이 글의 연관기사(경북일보)

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2959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