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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건 시평] 인간과 자연의 소통 노래한 여류시인

여행과 미디어/섬여행과 책

by 한방울 2013. 12. 3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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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의 소통 노래한 두 여류시인 시집

김명림 <어머니의 실타래>, 사윤수 <파온>

 

최근 지역 여류시인이 펴낸 두 권의 시집이 출간돼 화제다. 두 시집은 향토성과 연륜의 깊이를 바탕으로 하여 소박한 서민의 삶과 생각을 조근조근 읊조리고 있다. 정겹고 훈훈한 시어들이 전율한다. 두 시인 모두 2011년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어는 청아하고 바라보는 시선은 산내들 산들바람처럼, 강물처럼 파도처럼 서정적이고 서경적이며 철학적이다.

 

가족애 넘치는 <어머니의 실타래>

 

강원 양구 출신으로 충청도에서 활동하는 김명림시인의『어머니의 실타래』에 등장하는 ‘고백’이라는 시편은 친정어머니가 아닌 시어머니에 대해 애틋한 심정을 담고 있다.

 

“추석 다음 다음 날/시어머님 생신입니다/보름달에 가리어/생신상 한번/변변히 받아보지 못하신 어머님”

 

명절에 가려 죽어서도 그늘에 지내는 우리 조상들의 군상을 떠올려준다. 그것이 어머니라면 더욱 애절해지는 법. 부모의 제사는 은덕을 추모하는 전통적 관습임에도 하루 다르게 변하는 첨단 디지털시대를 만나 제사를 어떻게 모실 것인가, 합칠 것인가 말 것인가? 오빠들이 지내냐? 큰 며느리냐 작은 며느리냐? 여차 문제들은 빼놓을 수 없는 명절 이슈 중 이슈.

 

 

 

 

딸아이 먹다 남기고 간

방울토마토 몇 알

코끝이 찡하다

엄마! 사랑해

휴대폰에 찍힌

맑은 눈물을 읽는다

딸아이 두볼 닮은

붉은 방울토마토

발그레 웃는다

 

 - ‘방울토마토’ 전문

 

결국 김명림 시인도 그 어머니의 딸이고, 그 딸의 어머니 인생을 산다. 딸에 대한 끈끈한 사람이 붉은 토마토 빛깔만큼 뜨겁게 전율된다. “딸아이 먹다 남기고 간/방울토마토 몇 알”이라는 사실만으로 “코끝이 찡하다” 어머니가 늘 마음의 거울 속에서 얼마나 마음 닳도록 딸을 불러 세워 쓰다듬었을 것. 수 없이 쪽지를 쓰고 보냈을 것이다. 허공에 보내는 그런 편지의 답장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허공에 보낸 쪽지에 대한 답장이 하늘을 울렸는가? “엄마! 사랑해”로 돌아왔다. 그 한마디는 “맑은 눈물”의 강이 되어 흘렀다. 김현승 시인의 ‘눈물’처럼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었다.

 

사골국물 다 우려내듯 마지막까지 자식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어머니의 깊고 깊은 사랑은 ‘어머니의 실타래’라는 시에서 액자사진으로 함축된다.

 

어머니의 실타래는

풀어도 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실타래 속엔 팔순 등 굽은 소설책이

절뚝거리며 걸어온

우여곡절이란 길이 펼쳐져 있다

(중략)

이젠 십 리 밖에서도

어머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당신의 주름진 세월 너머로 해는 지려하는데

실타래 끝은 보이질 않고 먼지만 풀풀 날린다

 

“풀어도 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실타래 같은 어머니의 한 생애는, 역설적으로 풀어도 풀어도 얽히고설킨 인생을 여태 홀로 풀어내는 어머니의 풍진세상살이, 그 자화상이다. 해가 지든 다시 떠오르든 오직 어머니 길은 다시 연하여 능선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된다.

 

그렇다. “실타래 끝은 보이질 않고 먼지만 풀풀 날린다”. 농업박물관 한켠 먼지 묻은 농기계처럼 덩그렇게 놓여 야윈 어머니의 흔적들은 늘 가볍지만, 가볍게 볼 수 없는 깊은 강물로 소쿠라지곤 한다. “이젠 십 리 밖에서도/어머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는 시기에 만나는 우리 어머니.

 

김명림 시인의 시 전편에는 어머니, 딸, 남편 등 가족 사랑이 절절히 흐르고 있다. 연륜만큼 세상을 보는 눈길이 너그럽고 여유롭다. 긍정적이면서 젊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들에게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시켜주기도 한다.

 

“맛있게 낮잠 즐기다 받은 전화 한 통/친구 가슴에 못 박고 말았네/말(言)로 박은 못은/뺄 수도, 치료도 어렵다는데/IMF 이후, 담배 연기로/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남편의 안개 같은 등을 바라보며/헝클어진 삶을 살았던 그녀”

 

‘혀로 못을 박다’라는 제목의 시는 IMF로 직장을 잃은 지인이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고 자랑하는 전화 저 편에 대고 “나이 먹어 그런 것 뭐 하려고?/무심코 던진 내 한 마디”에 대한 자책을 토로하는 시이다. 그러면서 “수화기 너머 잠시 말이 없더니/그녀의 갈기갈기 찢기어진 자존심”을 헤아릴 줄 안다. 동병상련이다. 7080세대들이 경험한 자기고백이다. 계층 간 세대 간 갈등문제를 반추하고 이 시대를 향해 야단치는 완곡한 호소 같은 독백이다.

 

그의 시는 아주 쉽다. 평이한 문체로 담담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를 웅변한다. 서정성과 서사성을 반반씩 버무린 탓에 언술이 가볍지 않다. 이지엽 시인은 “재미성과 서민성의 미학을 보여주고 현대인의 이중성과 고뇌를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고 평했다. 맞는 말이다. 단절된 소통이 반복된 사회에서 홀로 울부짖지도 아니하고, 자기만의 방에서 외골수의 시편을 늘어놓는 말장난 시인이 아니어서 더욱 좋다. 어느 시골 여류시인의 참 정겹고 포근한 시편들이다.

 

 

 

 

액자소설에 가락 넣은 <파온>

 

경북 청도 출생으로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윤수 시인의『파온』에 대해 이제하 작가는 “디테일에 집착해 전전긍긍하지 않고 사물을 전체적으로 넓고 깊게 보려는, 일테면 롱 테이크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이런 그녀의 사유 태도에 믿음이 간다.”고 호평했다.

 

주지적 서정시편을 보여준 사례 중 ‘빨래가 마르는 시간’과 ‘언제라도(島)’라는 제목의 시에 눈길이 갔다.

 

세상에는 매달려서 견디는 것들이 많다

나도 어떤 것에 안간힘으로 매달려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던 때가 있었다

외줄을 잡고 젖은 빨래처럼 허공에서 뒤채었다

씨앗이 여무는 시간도 그러했으리라

양 팔 가득히 빨래를 걸치고 서 있는 건조대가

수령 오래된 한 그루 빨래나무 같다

 

 - ‘빨래가 마르는 시간’ 중에서

 

건조대에 걸린 빨래를 꺼이꺼이 살아가는 우리네 삶과 연결시켰다. 아주 쉽게 타자를 설득시키는 마력은 우리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재와 너부러지거나 빨래집게에서 간신히 매달린 빨래에 대한 비유가 탁월했기 때문이다. ‘안간힘’으로 ‘매달려’,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던‘ 빨래에 대한 묘사가 일일연속극 셋방살이 인생처럼 사실적이면서 서정적으로 그려졌다. 건조대를 ‘수령이 오래된 빨래나무’로 반전하는 테크닉이 돋보인다. 다만, ‘건조대’가 아닌 ‘빨랫줄’의 빨래를 노래했더라면 시적 건조함이 조금 더 녹아들었지 않았을까도 싶다.

 

말과 말 사이의 섬

아슬아슬 하거나 낡은 말 아니고

매운 연기와 시간의 깃털 같은 말 말고

파도가 곱게 늙어 죽을 때까지

여러해살이 풀꽃이 자라는 섬

언제라도(島)

 

‘언제라도(島)’ 시를 접하면서 날선 말들로 공세의 활시위를 주고받는 요즘 우리시대 자화상을 떠 올렸다. 이 시는 “파도가 곱게 늙어 죽을 때까지/여러해살이 풀꽃이 자라는 섬”처럼 “늦어도 꼭 와줄 것만 같은 당신의 손을 잡고/오래오래 맨발로 걷고”싶은, 그런 섬 같은 말이 되었으면 하는 시인의 섬을 아름답게 그렸다. 소통을 말하면서 일방향의 언어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에머슨의 말처럼 시(詩)가 왜 화석화 된 언어인지를 되새김질하게 한다. 말은 사상의 옷이다. 말은 마음의 그림이다.

 

말에 가락을 넣으면 음악이 되는데, ‘울음’이라는 시는 시인만이 넣을 수 있는 가락이 무엇인지를 십분 보여준다. 첫 문장부터 ‘물컹하게 곡진 음(音)이/기다란 리본처럼 허공에 너울거린다”는 만만찮은 가락과 비유법을 선보인 이 시의 절정은 이곳으로 보인다.

 

진양조로 밀다가 달구다가

자진모리 휘모리 풀었다가 맺으며

울음은 제 몸의 악보를 몇 장 째 넘겼다

베란다에 나가 둘러보니

건너편 예배당 앞에 중년의 여자가 서 있다

두 무릎을 달달 구르며 문손잡이를 잡고 흔든다

한 번만 보고 싶어요. 문 좀 열어 주세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오래 전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화적 액자소설이다. 이것이 다시 활동사진 영사기로 돌아간다. 울음은 속울음이 제 맛이다. 화자는 저편에 중년여인이 주인공인 가설극장을 세워두고 모노드라마를 가락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림을 소리로 그리는가 싶으면 다시 소리를 그림으로 그리는 동안 우리는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 속으로 빠져 들고, 낯설지만 다시 그 가락을 타고 살다보면 꼭 몇 번은 곡소리를 내는 삶 속으로 들어와 있음을 확인한다. 삶도 시도 결국 “주어를 잃고 목적어를 삼켜버린/한 문장의 울음이 끝없이 이어진다/엇모리 절름박자로/울음 고개를 넘어간다” 넘고 넘어가면서, 울음 울고 또 울어 예면서 절름대거나 넘어지거나 다시 일어서서 “허름한 쪽빛 치마가 보서진 음표처럼 찰랑인다” 허공에서 길바닥에서, 온 산천에서...

 

울음은 영혼에 남은 마지막 눈물이다. 눈물로 씻어지지 않는 슬픔은 없다. 눈물은 삶을 위로하고 인생에게 영혼의 맑은 종소리를 울려준다. 눈물은 슬픔의 말없는 슬픈 언어이다. 그 눈물을 가슴을 치면 울음은 곧 바닥을 친다. 곡이다. 울부짖음 혹은 진양조 아니면 자진모리의 끝 길에 이른다. 어떤 삶은 절망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절망에서 다시 절망하면서 언젠가 다시 맛 볼 샘물이 된다.

 

아무튼 질긴 삶의 의미를 터득한 두 여류시인의 시편들은, 사라져간 휴머니즘적 풍경과 각진 세상을 교차시키면서 삶의 의미와 자연의 가치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고,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2013.12.31)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4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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