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언론
박상건(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학부와 대학원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주로 미디어 글쓰기, 기사작성 실무, 글쓰기 비평이다. 대부분 미디어 보도 사례를 가지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올바른 기사로 바로잡아 써보게 하는 것인데 이런 원칙과 원리를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미디어 그들 자신인 것이다.
요즘 초중고, 대학 할 것 없이 NIE(신문활용수업)가 활성화 돼 있다. 그런데 수업의 기본 자료가 되는 신문들이 모범답안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신문은 세계에서 가장 당파성이 강하다. 기득권 중심 논리를 편다. 지극히 상업적이다. 독자보다 광고주를 하느님처럼 모신다. 그런 신문에 영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신문이 그들만의 리그가 되면서 여론왜곡은 물론 글쓰기마저 왜곡하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정치적 사례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보다는 그런 글 나부랭이를 기사랍시고 밥 먹듯이 써대는 일부 중앙지 기자들을 비롯하여 글쓰기의 중요성을 방기하는 부류들과 함께 글쓰기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해 지면을 통해 고민하고 짤막한 입장을 정리하고자 한다. 칼럼이란, 기사 일부이면서 개인 견해를 밝히는 것임으로 자유롭게 쓰고자 한다.
글은 자기 생각을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글은 자기표현의 수단이다. 글은 주장이 담긴 것도 있고 마음의 찌꺼기를 배설하듯이 마구 털어내고 늘어놓은 글도 있다. 취미 삼아 쓰는 글이 있고 자료를 모으고 관리하기 위해 메모 수준의 글쓰기도 있다. 누군가 그리우면 편지를 쓰고 억울하면 장문의 편지로 상대방에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런 것을 일기, 메모, 탄원서 등 나름의 이름을 붙여 장르를 구분할 뿐 글쓰기의 본질은 나를 표현하고 나와 너,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통로이고 수단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우리사회의 중요한 의사소통 통로이자 핵심이다. 아니 삶의 그 자체라고 표현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미디어라는 것도 결국은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맥루한이라는 학자는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정의했다. 메시지가 내용이라면 미디어는 형식이다. 그래서 글이라 하는 것은 각자에게 편안하고 설득이 쉬운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야 한다. 글을 인간의 격을 가늠케 한다. 상대방에게는 정직하고 공정한 글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속내는 숨기는 이중적이고 허황된 글은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을 부른다. 그런 구조에서 빚어진 글들은 숱한 말들만 생산하며 이웃과 사회, 국가 시스템을 뒤틀리게 한다.
그래서 모든 글이 쌍방의 통로이고 수단일 수는 없다. 그 글이 아름다운 소통의 메신저가 되기도 하고 서로의 이해가 충돌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글은 솔직담백해야 한다. 어릴 적 선생님이 일기를 쓰게 하고 또는 백일장에서 잘 쓴 글을 평가할 때 늘 기준이 되는 어휘가 있었다. “이 글은 솔직담백해서 좋은 글”이라는 것이다. 말이든 글이든 솔직할 때 감동을 준다. 가식적인 글은 오래가지 못한다. 마치 한 번의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흔 아홉 번의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처럼 글은 영혼의 도화선이고 배수구이다.
가식적인 글은 자기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고 신뢰와 공동체 문화에 금이 가게 한다. 정체성과 가치관의 혼란은 나를 넘어 사회의 진정성에 전도현상을 유발한다. 글은 자고로 가식과 허위에게 그 틈새를 주지 않는 특징이 있다. 글은 알맞은 소재를 가지고 적재적소에 사용해야 하는데 선동적이고 구호성의 시나 글 한 토막, 기사 한 줄이 세상 사람들을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 여론을 왜곡하고 조작하면서 국론을 분열시킨다. 글과 말 한마디가 사회적 갈등 요인으로 작동한다. 글은 그만큼 보이지 않은 마력과 저력이 있다. 특히 솔직한 글 한 줄이 우리 사회와 문화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모티브이자 대동맥 그리고 힘찬 에너지로 승화 하는 경우가 많다.
리더십의 대가 존 맥스웰과 세계적인 심리학자 레스 패로트는 ‘신뢰를 얻는 25가지 심리 기술‘이라는 책에서 “글로 쓸 때가 말로 할 때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말보다 글이 강력하다. 글은 글쓴이가 잊은 후에도 오랫동안 격려해주는 힘이 있다. 몇 분이면 쓸 수 있는 글 몇 줄이 몇 십 년 동안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준다.”라면서 “완벽한 작가가 되려고 하는 것 대신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글에 집중하라”라고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의사소통 방식을 길러야 물 흐르듯이 글을 써 나갈 수 있다. 인터넷대중화는 이런 면에서 글쓰기 수단으로 안성맞춤이다. 이메일을 통해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자주 시도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단문의 문자메시지 보내기보다는 이메일 교환을 통해 자기주장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방식을 익혀두는 것이 좋다. 대학 수업 시간에 이런 방식을 시도해 본 결과 실질적인 효과를 보았다.
다만 이메일 쓰기에서는 가능한 은어, 속어, 유통언어를 지양해야 한다. 유통언어라 함은 “사랑의 상징은 장미”라는 것처럼 누구나 아는 어휘를 말한다. 대신 “노을처럼 타오르는 장미”라든가, “꽃이 떨어진다”라는 유통언어 대신에 “꽃비가 진다”라고 표현하면 글은 감칠맛이 난다. 여운이 있다. 감동과 설득이 작용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새로운 언어를 발굴 사용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토속어 등 풍부한 어휘력은 문장력을 배가시킨다. 그런 어휘력은 결국 체험과 독서 등을 반복하게 만든다.
이런 문화 트렌드를 격하시켜 최근 MBC 여성 아나운서가 자살하고 연예인이 자살할 때마다 젊은이들의 인터넷 악성 댓글을 글쓰기와 양심의 전체 문제인양 지적하는 여러 언론의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본질의 왜곡이다. 적반하장이다. 남의 죽음을 상업화하고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기자 집단의 몰양심이 먼저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디어의 역기능이다. 기성세대 투서질은 악성 댓글의 원조이다. 순기능을 도외시할 정도로 역기능이 압도된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는 양면성이 있다. 한 부분을 전체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언론인들의 공명심과 편견과 자만 탓은 아닐는지.
자고로 글쓰기는 장르를 불문하고 솔직해야 한다. 글은 순수 빛이어야 한다. 누군가를 해하지 않는 글이어야 한다. 그릇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일러 양식 없는 사람이라 한다. 글은 마음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글은 그대로 그 사람의 양심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책임을 동반한다. 글은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허공에 뱉어낸 말이나 하얀 백지에 우뚝 선 글씨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다. 글의 주인이 곧 글의 주어이다. 주어는 서술어를 이끈다. 그 행간에서 많은 이들의 가치관과 판단이 견인된다. 주인은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주인이기에 책임을 요구받는다.
이처럼 글은 자유와 권리를 동시에 타고 났다. 배울 때, 사회에 나갔을 때, 권력을 쥐었을 때 서로 다른 글쓰기를 해서는 안 된다. 글은 환자의 수술 부위를 다루는 수술용 칼에 비유한다. 잘 쓰면 사람을 살리고 잘못 쓰면 사람을 죽인다. 글은 좋은 곳에 씌어져야 한다. 쓸 만큼 글을 쓰는 단계에 접어들면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글은 사치와 권력의 수단이 아님을, 글은 자기검열과 우리 사회 가치창조의 길을 안내하는 등불이어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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