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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섬과 문학기행/붓가는대로 쓴 글

by 한방울 2004. 2. 1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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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높은 가을 하늘, 낙엽이 포물선을 그으며 떨어진다. 아직 가지에 매달린 잎들은 먼저 간 낙엽들을 향해 부지런히 손을 흔든다. 흡사 천진난만한 조무래기들이 무어라 소리치고 손뼉치는 모습 같다.

도심에서 수북한 낙엽 밟는 일은 의외의 축복이다. 미화원 아저씨의 부지런한 빗질이 스치기 전에 지상에서 나그네 발길을 기다리는 낙엽들. 이따금 낙엽 태우는 냄새가 저녁 연기 나부끼던 시골 정취를 일깨우고 늦가을 정취와 움츠린 사람들의 콧등에 온기까지 더해준다.

낙엽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곧 만날 것임을 안다. 오고가는 사람들 신발 위에 바둑이처럼 나뒹굴고 물구나무서는 낙엽을 보면, 무언가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만 같다. "사람들아, 이쯤에서 한번쯤 정신없이 달려온 당신의 뒤안길을 돌아보렴..."

* "시몬, 나무 잎새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문득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의 오솔길을 걸었다. 프랑스 시인 구르몽의 '낙엽'을 외우며 걷던 그 가로수 길, 괜스레 슬퍼서 눈물 흘리고 가슴앓이 하던 가을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주인공처럼 못 다한 사랑의 고백을 낙엽 한 장으로 갈무리하여 책갈피로 끼워 놓던 그 가을날.    
 
 시몬
 나무 잎새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덧없이 버림을 받고 땅위에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녘 낙엽 모습은 쓸쓸하다.
 바람에 불려 흩어질 때
 낙엽은 상냥스러이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라.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었다.
 그리하여 바람이 몸에 스며든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리라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었다.
 그리하여 바람이 몸에 스며든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구르몽- '낙엽' 전문)

발자국 아래 밟힌 낙엽을 찬찬히 들어다보노라면, 낙엽에는 낭만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심오한 사랑과 오묘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낙엽은 가을 허공에서 작별의 순간을 맞지만, 지난날 푸른 엽록소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다했다. 지금, 열심히 살아온 만큼 낙엽은 입 꽉 다문 채 미련 없이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다.

* 낙엽의 방황은 숲으로의 귀향이다

낙엽 지는 그 자리는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준 뿌리이다. 가지마다 매달려 온 세월들, 그 혈맥은 뿌리이다. 낙엽은 그 혈맥을 향해 바짝 엎드린 채 온기를 불어넣으며 겨울나기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병신자식이 효자 노릇하듯 떨어진 잎들이 땅을 보호하고 다람쥐 토끼 승냥이의 먹이가 되어 공양한다. 마지막까지 더불어 살아가는 숲의 원천임을 웅변하고 있는 저 낙엽.

풍진 세상 썩어 문드러지면서 새로운 봄날을 꿈꾼다. 봄날의 새순은 낙엽의 후예이다. 그 혈맥들이 푸른 잎맥으로 생명의 깃발을 흔든다. 잘생긴 나무는 중간에 꺾이지만 굽은 나무는 그렇게 비바람 속에서 선산을 지키듯 살아 남는다. 낙엽의 최후 기항지는 그렇게 열정과 헌신으로 가는 진행형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치명적인 청각장애에서 만들어졌듯이, 베토벤의 영혼이 마침내  깊은 울림을 살아났듯이 고독한 나무는 강하게 자란다. 대기 오염과 거센 바람 속에서도 허공에 등 기대어 마음 비우며 살아가는 나무. 고독한 나무의 친구는 나무향기며 아랫도리에서 서식하는 꽃향기이다. 서로에게 위안자가 되어 그렇게 격동과 회한의 시간을 뚫어 간다.

지금 저 낙엽의 방황은 고향으로 귀향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눈보라 비바람 몰아치고 빗줄기가 세차게 흙구덩이 후벼 칠 때마다 나무의 뿌리는 뒤흔들릴 것이지만, 뿌리는 겁탈 당하지 않으려는 흔들릴 것이지만, 흙들은 서로의 빈틈을 낙엽으로 메우며 가슴을 끈끈하게 끌어안을 것이다.  

낙엽은 찰진 흙의 뼈대이다. 땅거죽 후려칠 마다 땅에 바짝 엎드려 온 몸으로 막아내는 것은 낙엽이다. 낙엽은 뿌리의 방패이자 나무들의 첨병이다. 어쩜 자기가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알고 죽어서 세상의 희망이 되어주는 낙엽은 아름다운 성자이다.

* 낙엽 지는 가을은 철인만이 즐길 수 있는 계절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가을은 철인만이 즐길 수 있는 계절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비우고 비워서 안으로 성숙한 나무들. 그 나무들 비움의 철학을 읽어낼 줄 아는 자만이 낙엽 지는 이 가을을 읽어낼 줄 안다는 뜻일 게다.

낙엽은 타인을 위해 보금자리를 내어준다. 자신을 던져 누군가 따뜻한 위안이 된다. 지금 이 가을 우리는 그 누군가에게 그 무엇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인가? 줄 수 있다는 것은 나눔과 이해의 마음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나누고 비우면서 타인의 행복이 되는, 그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는 낙엽. 지금 낙엽 지는 거리에서 우리는 생태계의 진리를 읽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신갈나무, 당단풍 등에는 탄소 질소 황 칼륨 칼슘 마그네슘 등의 영양소가 가득하다. 특히 당단풍은 겨울에도 그 몇 잎 끝끝내 달고서 겨울 허공에서 버틴다. 그렇게 버티고 서서 마지막 엽록소가 다할 때까지, 푸른 봄날이 당도할 때까지 한겨울을 이겨내는 것이다.

낙엽은 비바람에 울고 썩어 작물의 밑거름이 된다. 버섯, 지렁이, 달팽이 등 작은 생물들의 생존 근거가 되기도 한다. 낙엽은 분명, 그 무엇을 위한 생명줄이요 생명이 버티고 설 기름진 토양의 토대이다.

기름진 토양은 홍수를 막는다. 그래서 구르몽은 낙엽에 대해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너무나도 부드러운 빛깔", "너무나도 연약한 땅 위에 흩어져 있다"고 극찬했던 것일까.

* 낙엽은 죽어 토양을 살찌우고....

낙엽은 인내와 생명의 증거이다. 공사장 포크레인에 파헤친 흙구덩이의 그 흙과는 숲의 흙은 분명 다르다. 숲의 흙은 부드럽고 상큼한 내음이다. 공사장의 흙은 부식토로써 역겨운 냄새이다. 비가 오면 모래알처럼 부서진다. 부실 공사의 주범이다. 그러나 아름드리 숲의 무성한 잎은 썩어서 깊게 다진 버팀목이다.

또한 폭우가 내리면 숲은 나뭇잎으로 빗물을 받아친다. 충격을 완화하여 나무 밑동으로 빗물을 밀어낸다. 그렇게 빗줄기는 훼방꾼으로 왔다가 나무 기둥에 서서히 스며들어가 엽록소의 일원이 된다. 숲의 건강은 곧 마을 홍수를 막을 수 있는 가늠자이기도 하다.  

저 멧부리, 나뭇잎에 매달린 영롱한 물방울을 보라. 저 한 방울이 무성한 숲의 젖줄이다. 넉넉함이 넘치면 계곡으로 길을 튼다. 평화로운 민가의 평야지대로 젖어간다. 샛강 지나 큰 강물이 '어기여차' 노래를 부르며 이윽고 큰 바다에 이른다.

이러한 산수(山水)정신에 따라 천하의 만물들은 굽어 내려가는데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며 자꾸 위로만 올라가려는 인간의 군상. 위는 늘 가파르고 경쟁뿐이거늘, 경쟁은 서로의 단절을 부르거늘. 우리는 왜 더하고 끌어안고 살려고만 하는 것일까...    

* 낙엽은 눈발을 부르며 한해의 끝을 암시한다

이 거리를 나뒹구는 노란 낙엽들이 비운 자리에 이제 흰 눈이 내릴 것이다. 사람들이 짓밟은 길에는 꽃도 나무도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눈은 헐벗은 가지로 길을 낸다. 눈은 내리고 내려서 그렇게 낙엽이 떠나간 자리에서 새 봄의 희망을 흔들어 깨울 것이다.

눈들은 먼저 간 낙엽의 사리처럼 하얗게 허공에 휘날리며 온다. 지상의 낙엽들은 눈발에 축축이 젖어간다. 눈물에 젖어 낙엽은 더 깊이깊이 흙과 살을 비비고 섞는다. 낙엽은 눈더미 아래서 들썩들썩 진통하면서 새 봄을 잉태한다.

낙엽 뒹구는 거리에 그렇게 봄은 올 것이다. 낙엽 지니, 겨울이 옴을 알 수 있다. 낙엽처럼 덧없이 스친 세월 속에 벌써 한 해가 저물었음을 느낀다. 돌아보면 늘 후회 막심한 세월들. 그러나 후회의 시간들이라면 지난날은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이리라. 그런 시간들 위에 눈은 내리고 쌓여 새해 새 아침 여백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시몬, 낙엽 구르는 소리를 들으니, 이제 우리도 이별의 시간이 왔나 보다.
시몬, 한해의 끝자락에서 이제 우리도 아름다운 이별과 만남을 예비해야 할 때인가 보다.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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