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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털고 가을길로 떠나기

섬과 문학기행/붓가는대로 쓴 글

by 한방울 2003. 9. 1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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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매미가 북상하여 온 세상이
달디단 한가위 맛을 쓴맛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명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연사흘
텅 빈 가슴에 번뇌만 쌓이는 나날이었드랬습니다.
내려가도 번뇌, 가지 않아도 번뇌인 것을 알면서도
늘 이런 일을 되풀이하고 나면 불효라는 자책감뿐입니다.

마음이 한자리에 머물지 못하면
누구나 사람 사이에 있고 싶지 않음이 인지상정인가요?
예약했던 기차표를 교통편이 없어 고민하는 친지에게 주고
향수에 젖어 오는 그대 가족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고향 원죄를 슬쩍 씻어보려는
이 얄팍한 생각을 하는 것도 이미 제 영혼이 녹슨 탓은 아닐까요?

번뇌를 끓는 것이 이승이요 번뇌가 나지 않는 것이 열반이라 했죠.
세상은 어찌 보면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없도록 만들어놓은
아주 평등한 마당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적 부와 절대적 자유를 주지 않았으니 말이죠.
개미는 개미대로 기어가면서
매미는 매미대로 삶의 열망과 서럽게 울면서 여름날 마지막 자유를 누렸겠죠.
자유가 아니라 어쩜 마지막 운명의 선택의 순간을 했을 터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기나긴 번뇌의 시간들이 바로 이런 생각들을 하게 하더군요.
열반경에 나온 글귀를 보면 세상은 평등의 마당이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지혜가 있을 때에는 번뇌가 없고 번뇌가 있을 때에는 지혜가 없습니다.
지혜란 무엇을 구할 것인가, 무엇을 피할 것인가에 관한 지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로마의 정치가 시세로가 한 말인데요. 저는 이 말에 크게 공감해오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지혜의 결말은 바로 매 순간에 주어지는 선택에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지혜는 경험의 딸이라고 했고,
그리스 3대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지혜는 곤란으로부터 온다고 했나 봅니다.

제가 소시민이라서 그럴까요?
최근의 제 번뇌는 늘 외부로부터 왔다고 생각합니다.
눈물과 슬픔을 인내하는 실험마당 같은 아픔의 연속이었니 말입니다.
누군가가 그러하더군요. 物은 녹스는 것이요 魂은 비우며 살찌우는 것이라고.
그래, 바로 그거야. 지혜는 비우며 살찌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저는 지금 빈 사무실에 나와 내일을 생각해 보고 있답니다.
다가오는 내일부터는 어제와 전혀 다른 굳건한 가을의 길을 떠나야겠다고
전혀 다른 새로운 가을과 겨울나기로의 사색을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색은 자각의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 길에 들어섰을 때, 저는 번뇌는 나의 위대한 스승이었노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번뇌의 입김으로 내 영혼이 자라왔음을 자각하고 싶습니다.
그 동안은 번뇌는 내 영혼의 오솔길로 들어서기 위해 지불해야 할
내 마음에 진 빚의 이자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잠시 힘들었던 길이라면
마음의 번뇌를 벗고
이 아름다운 가을 길로 함께 나서보지 않으시겠어요?

* 책 한 권 추천합니다:
추석 선물로 받은 책인데요. [정명훈의 Dinner For 8]입니다.
다양한 음악을 조화롭게 지휘하는 것과 각기 다른 맛을 요리하는 것과 흡사해 요리를 좋아
한다는 정명훈씨의 삶과 요리법을 일러준 책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박상건 홈페이지: www.pass386.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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