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공연 중인 장면
광복절 기념 일본 공연 때 살풀이 춤 장면
일본과 세계에 한국 춤사위 전하는 ‘문화 전도사’
아시아, 유럽, 미국 등 ‘한국 춤’ 해외공연 150회
일시 귀국한 재일교포 한국무용가 천명선(60) 씨를 지난 5일 대구에서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2년 전 일본 공연을 동행취재하면서이다. 2007년 8월 15일 일본 가나가와현 민단은 광복절 62주년 행사를 요코하마 간내홀에서 장장 5시간 동안 치렀다.
일본에는 48개 민단 지부가 있다. 특히 가나가와현 본부에는 9개 지부가 있고 민단 중에서 유대관계가 끈끈하고 유일하게 전통문화를 통해 동포 2세와 3세들에게 조국에 대한 향수와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일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1997년에 한국무용가 천명선 씨를 중심으로 시작해 2000년 문화사업추진위원회를 새로 꾸려 천명선 씨를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천 위원장은 이날 광복절 62주년 행사를 한국 전통예술 특별공연 중심으로 기획하고 연출했다.
천명선 문화추진위원장은 “세월이 흐를수록 동포들의 위상은 견고해지고 있지만, 가슴 깊이에 뿌리내려야 할 애국심과 전통문화의 가치관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면서 “특히 젊은 층에서 우리 것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일본문화에 휩쓸려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가나가와현 민단 사무실에는 ‘민단가’가 걸려 있다. “맑은 하늘 꽃피는 동산 그리운 내 조국/가슴에 지니고 힘차게 사는 우리는 대한의 겨레/이성의 풍상은 거칠고 매워도 우리 앞길 막을 자 없나니/보아라 눈보라 무릅쓰고 피어나는 매화꽃”
‘매화꽃’의 의미를 웅변하듯 민단 건물 7층에는 각종 전통악기를 구비한 청소년 전통문화 도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22년째 동포 2세와 3세들을 대상으로 한국문화예술 전승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당시 광복절 행사장에서 2세와 3세들이 펼치는 열정적인 한국무용 공연에 관람객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후손들을 통해 우리 것에 대한 긍지와 조국에 대한 향수, 그리움 등 만감이 교차했을 터.
천명선 씨는 일본뿐 아니라 중국, 필피핀, 미국, 호주, 캐나다, 독일, 헝가리, 러시아, 노르웨이 등 150회가 넘는 해외공연에서 한국 춤을 알려온, 그래서 해외에서 더 유명한 한국 무용가이다.
그는 한국 무용 중에서도 ‘교방무 대가’로 불린다. 교방무는 교방(敎坊)에서 춘 춤을 말하는데, 동작이 복잡하고 즉흥성을 겸비한 고도의 기량을 갖춰야 제대로 된 춤을 출 수 있다. 교방무 특징은 한국 춤의 4가지 요소인 한, 흥, 멋, 태를 고루 갖췄다. 이 춤은 차분하면서도 끈끈하고 섬세하며 애절한 춤태가 볼 만하다. 천명선의 교방무는 정, 중, 동의 신비롭고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무아지경으로 이르는 과정이 매력적인 춤이다.
2007년 7월 30일 나는 필리핀 초청 ‘한국전통 무용의 밤-천명선의 춤 세계를 향한 디딤’이라는 제목의 공연 길에도 동행했다. 경기민요의 대명사가 된 김명순 무용단, 대금연주자 문동옥 선생, 거문고 병창의 이형환(중앙대 교수), 굿거리 장단의 한상일(동국대 교수) 등이 공연단으로 동행했다.
필리핀은 6.25전쟁 때 5번째 규모의 병력을 파견한 국가이다. 그는 필리핀 참전용사들을 찾아가 감사공연과 필리핀에 거주하는 10만 명의 동포를 위한 위문공연도 동시에 준비했다. 필리핀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6월12일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그는 이처럼 늘 위로와 감사, 사랑과 평화를 주제로 공연을 통해 소통했다. 특히 한류 기지개가 채 펴기 전부터 우리문화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동포와 아시아 우방들과 하나 되어 한국 음악과 무용을 향유하겠다는 그런 ‘의미’를 부여한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했다.
그가 당시 필리핀 첫 공연 장소로 택한 곳은 한국 마리아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걸스타운. 걸스타운은 어려운 환경에 처한 4천여 필리핀 학생들을 위한 배움과 삶의 터전이다. 그는 우리가락의 평온함과 아픔을 극복한 한국적 삶을 스토리로 위로와 용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공연을 펼쳤다.
본 공연은 필리핀 국립리잘파크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공식 공연 명칭은 ‘필리핀 초청, 천명선의 춤 세계로 향한 디딤’이었다. 이날 공연은 필리핀 국영방송(ch4)과 16개 케이블방송을 통해 필리핀 전역에 방송됐다. 하와이 등에서는 녹화방송을 통해 교민들에게 향수어린 전통가락으로 여울져 갔다.
천명선. 그는 경상북도 대구 출신으로 일곱 살 때 무용을 시작했다. 당시 사업가인 아버지는 유난히 몸이 약한 ‘소녀 천명선’에게 무용을 권했다. 그렇게 창극단 박초양 선생 아래서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시절에는 직접 무용단을 창단했다.
스물한 살 때 일본 삿포로 눈 축제에서 공연한 것을 계기로 재일교포와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는 딸에게 한국에서 한국무용에 전념하라고 권했고, 그는 일본에 가더라도 무용을 계속하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스물다섯 살에 요코하마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일본과 대구에 전통무용연구원을 설립해 일본과 대구를 오갔다. 그러던 중 남편이 세상을 떴다. 춤꾼인 그는 큰 사업체를 떠안게 되었고 시댁의 권유로 조카에게 회사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5년이 흐른 뒤 조카는 거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빚만 남겨놓은 채 자살했다. 엄청난 부채를 고스란히 안은 채 각종 송사에 시달렸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소송에서 이겼을 때 결과물은 단 한 가지. “이제 남겨진 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법원의 결정이었죠.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렇게 홀로 춤에 빠져 그 시절을 헤쳐 나왔다.
뭐니 뭐니 해도 그에게 늘 든든한 버팀목은 일본 교포사회와 동포문화예술인들로부터 평판이었다. “천명선은 일본에 남은 유일한 보석이다”, “민단에 남아서 계속 우리 것을 살려 달라”는 바람이었다. 최근 귀국한 그에게 대구지역 유지들과 예술인들 역시 대구에서 활동을 계속하며 후진양성에 도움을 주라는 것, 한일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직함도 늘어났다. 민단 문화추진위원장 외 일본동부 민주평통 자문위원, 경상북도 도민회 상임이사, 한국 일본 천명선 문화아카데미 연구소장 등이다. 그는 “힘닿는 데까지 기꺼이 전통예술을 통해 양국, 양 지역의 교두보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1997년 전주 대사습 전국대회 무용부 장원, 전국 국악 전통예술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국악계에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무용부분 심사위원을 맡아왔으며, 해외 각국 동포사회의 국악예술 부문 자문위원을 맡아 국제무대를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다.
천명선 춤사위는 관객, 특히 주부들의 눈물을 쥐어짜게 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공연 가운데 한 대목인 일본공연의 경우 일본 주부가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현지 방송에 그대로 방영돼 시청자들을 또 한 번 울리기도 했다.
눈시울의 발단은 한국 전통무용의 독특함 때문인데 특히 가늘고 긴 곡선의 운율이 심금을 울린다. 한국 춤의 특징이자 동양적 메타포의 매력이기도 하다. 이는 일본인들도, 재일 교포들도 동시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일제 강점기의 서러움을 딛고 살아나는 춤사위인가 싶으면, 모진 세상을 헤쳐 가는 한국 여성들의 신산한 삶이 묻어난다. 이윽고 모성애의 잔잔한 울림이 되고 저마다 가슴을 치고, 눈시울 따라 가다보면 이내 마음을 적신다. 한국 춤, 천명선의 춤사위가 전율하는 매력 포인트가 거기에 있다.
천명선 춤은 한국 전통문화가 지닌 끈끈한 한과 자연과 교감한다. 자신의 지난날의 삶을 한국 전통 서정과 한의 가락에 잘 녹여 호흡하는 ‘천명선의 춤’은 자신을 몰입하면서 동시에 관객들도 울고 웃는 신명난 한 판으로 불러들인다.
이심전심으로 그렇게 이어진 잔잔한 여울과 춤사위에서 풀어지는 것들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그 역경의 파노라마들이다. 다시, 무대에 사뿐사뿐 뛰는 그의 율동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과 고국이 걸어온 뒤안길을 돌아보게 한다. 개인도 민족도 저마다 파란과 지난한 역사의 여정을 걸어왔지만 무대 배경과 여러 장단의 가락과 춤꾼은 마침내 하나가 되어 ‘산경진수’, ‘산수정신’의 세계에 천착한다. 그렇게 삶과 예술이 만나 또 다른 세계로 승화되고 동화되고 교감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런 점에서 천명선은 분명 경쟁력과 자랑스러움을 겸비한 ‘한국 전통문화상품’이다. 구름 속에서 춤추는 선녀춤은 한국적 풍경과 민요, 설화 등 동양적 신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5천년 한민족 여정이 절제되고 함축되고 풀어지기를 반복한 신비와 감동적 스토리텔링이다.
그가 스스로 택한 그 길, 그는 그렇게 한국 춤판으로 대한민국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느 나라이든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2007년 당시 필리핀 공연을 며칠 앞두고 공연의 의미를 묻자, “아시아는 물론 세계와 공유하는 우리문화의 전도사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 5일 대구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일본과 우리나라, 작게는 대구와 일본 사이에서 우리문화 전도사 역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날이 험난한 춤의 터널을 열정으로 극복한 시기였다면, 이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문화를 통한 커뮤니케이터, 후진양성의 길라잡이고 싶다”고 말했다.
* 이 글은 데일리스포츠한국(2019.7.12), 리빙TV(2019.7.11)에도 특집인터뷰으로 실렸습니다. * 천명선 무용아카데미(http://cafe.naver.com/idfm)
데일리스포츠한국 주말판 17면 인터뷰 기사(201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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