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여백 속의 나무(사진=박상건)
[시와 풍경이 있는 세상] 17 도종환, ‘여백’
넉넉한 허공처럼 누군가를 쓰다듬어주고 여백이 되어주는 삶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 도종환, '여백' 전문
눈 내리던 숲에서 잠 못 이루며 하룻밤을 지새본 적 있다. 그 새벽하늘에 나뭇잎 다 떨군 채 잔가지들이 하늘을 여백으로 도드라지게 뻗어가는 풍경을 보았다. 물고기 잔가시처럼 선명하게 하늘에 판박이 된 풍경에 꽤 놀랐었다. 그런 숲, 혹은 먼 산 바라본 적 있는 사람에게 이 시는 아주 실감나게 다가설 것이다.
어두운 숲의 풍경이 어둠 속에서 묻힐 것 같지만 실상은 하늘을 배경 삼았을 때 얼마나 생생하게 흔들리는가를 보았다. 하물며, 대낮 그런 여백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에 등 기대어 선 나무들이라면 그 출렁임은 더욱 강렬할 것이다. 여백의 힘은 그렇게 크다. 그렇게 하늘은 엎드린 채로 겨울나무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고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한 마리 해오라기가 밀물의 백사장에서 자태를 뽐내듯,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백사장에 찍히듯, 나무들의 겨울나기를 희망차게 빛내주는 것은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여백은 그렇게 아름답고 강렬하다. 각지고 추울수록 좀 더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할 일이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아는 삶,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여백이 되어주는 그런 삶을 살 일이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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