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털며 척박한 길 헤쳐 온 실천하는 지성인, ‘리영희 선생’
박상건(언론학박사. 성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이웃과 함께 진실을 추구하는 글쓰기 지향
2010년 한해가 다 기울어가는 12월 5일의 길목에서 리영희 선생이 별세했다. 지난 11월 26일 밤 중환자실에서 위급함이 전해지면서 언론계에 한 때 “별세다”, “아니다”로 부음소식이 엇갈렸는데 결국 더 오래가지 못했다. 향년 81. 2000년부터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몸이 마비되는 등 고생을 해왔다.
한국 근대의 특징인 식민지 경험과 남북분단, 나아가 시대적 민족적 과제인 통일민족국가에 이르는 노정에서, 문제의 핵심을 캐고 논쟁을 지피며 민중의 정신을 일깨우는 이들을 우리는 지식인이라 부른다. 지식인의 흐름은 이데올로기 흐름 속에 있다. 그러기에 좌우 대립은 필연적이었고 논쟁 또한 격렬했다. 이에 필연적으로 지식인의 역할과 위기론이 늘 상존, 상치되면서 한국 지성사의 가장자리에서는 불꽃 튀는 논쟁이 계속됐다.
언론인 리영희 선생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척박한 땅 가장자리에서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며 온몸으로 이 사회의 모순을 뜯어고치고 포효하며 행동했던 지식인이었다. 분명 한국의 진보적 지성의 상징이다. 시대의 진실을 추적하고 그런 삶을 지향하며 외길 투쟁사를 써온 우리시대 진실의 대명사이다. 그 치열한 글쓰기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가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글을 썼다”
우상의 껍데기를 깨는 이성적 창조작업 주도
<르몽드>가 ‘사상의 은사’라고 표현했던 한국의 대표적 지성 리영희. 2001년 한국기자협회가 전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언론인 중 가장 존경하는 언론인 1위로 선정되었다. 74년 ‘전환시대의 논리’를 펴낸 이후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 전쟁’, ‘역설의 변증’, ‘自由人 자유인’ 등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우상을 깨는 이성의 글발과 힘찬 목소리는 기실, 이 땅 젊은이들의 의식화의 종소리였다. 그 지적·사상적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반지성적 극우·반공교육에 길들여진 젊은 지성들은 그 글과 행동의 프리즘을 통해 우리 민족사회의 정치·사회·문화·사상적 문제에 눈을 뜨고 혼란스런 가치관과 함몰된 우상의 껍데기를 내던질 수 있었다.
그이의 글쓰기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숱한 자료를 제시해 딱 떨어지는 논리를 편다는 사실이다. 진실을 알면 세상의 일들이 죄다 달리 보이는 법. 그렇게 문명사회 비평적 관점에서 여러 현실 속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까발리면서 어용교육에 길들여진 민중들의 사유의 틀을 창조적으로 파괴시켰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렇지 못한 지식인들을 향해 대중에게 좀 더 솔직하라고 촉구할 때마다 그이의 책들은 ‘좌경 의식화 교과서’로 낙인을 찍혔고 그는 반지성적 극치들의 희생양으로 형무소를 세 번이나 드나들었고 해직과 복직을 거듭해야 했다.
이데올로기 망령 걷어내며 민중의 전위요 후방
그이는 60년대 진보적 지성을 표방하며 세계와 민족의 진실을 불 밝히는 삶을 살아왔다. 70년대에는 우리사회에서 금기시 되었던 베트남 문제를 강대국 군사력과 인간집단 간 싸움이라는 시각이었다.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하는 지금 다시금 30년 전 그이의 시각이 청명하게 빛발치는 이유는 왜일까? 이 얼마나 진보적 전망이며 정확한 식견인가 말이다. 중국 문제 역시 여러 통계자료들을 바탕으로 파고들며 민중의 닫힌 생각을 열린 생각으로 변화시키며 남한 내 이데올로기의 망령들을 걷어내는 그이는 민중의 전위요 후방이었다. 정녕 이슬을 털면서 척박한 길을 헤쳐 온 시대적 민족적 진보적 참지성이었다.
중공을 이야기할 때 그이는 이후 중국을 예견했고 다시 사람들이 중국을 이야기할 때 그이는 북한을 북괴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북한 문제를 제기하며 북한 변화의 절실성에 천착하여 남북한 문제를 거점으로 한 한일, 한미관계의 역학구조를 비판,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전문가적 식견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본에 대해서는 “이 반도, 금수강산에 다시는 일본군대가 들어올 필요가 없게 하는 길은 분단 민족 간의 화해, 남북 단위의 반민족주의가 아니라 반도 민족 전체를 생각하는 ‘대민족주의’” 라고 강조했다. 인권문제 역시 일제 식민지 지배기간을 한국의 인권문제가 굴절화한 최초의 시기로 규정했다. 해방이후 인권이 보장될 수 없었던 이유는 일제 청산의 철저하지 못함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이를테면 61년 국립경찰 최고 간부 73%가 일제하에서 헌병경찰과 밀정의 역할을 했다는 것. 그렇다면 현재 이 땅 정치권력과 재벌권력 내 친일 청산은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일까? 여전히 서글픈 생각뿐이다.
지식은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다
그이는 90년대에 들어서는 총체적 포괄적인 관점의 세계인식으로서의 철학적 지향작업에 골몰했다. 그런 대표작이 ‘自由人 자유인’이었다. 이 책 머리말에 쓴 한 구절이 아직도 강렬하게 필자의 기억에 남아있다. “화해와 평화와 사랑의 시대정신이 도도히 밀려오는 오늘에도 힘과 전쟁과 미움의 철학에서만 마음의 평온을 누릴 수 있는 이는 더 지체할 필요가 없다. 서슴없이 책을 덮고, 옆에 있는 미국판 전쟁 만화나 범죄소설 진열장 앞으로 발을 옮기기를 권한다”라는.
광주항쟁 이후 4년간 두 번째 해직교수 상태에서 복직한 이후 첫 발표했던 글이 언론계와 지식인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었다. 그 문제의 글이 ‘지식인의 기회주의’라는 제목의 글이다. “…집필불허 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광주학살정권의 몰락까지 신문·방송·잡지 등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희대의 범죄 집단을 ‘단군 이래 영면한 지도자’고 아첨하는 신문·방송과 그것을 통해서 글과 말로 날뛰는 이 땅의 소위 지식인의 작태를 보면서 분노할 뿐….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良貨는 惡貨를 구축한다’. 거짓에 대해 변함없는 참은 또 싸워야 할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소위 제도권 언론이 원고청탁을 해오자 그이는 전략적으로 이를 허락했다. 이 글에서 그이는 언론권력과 지식인의 기회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렇게 시대의 굴곡을 넘나들며 불의엔 굴곡함이 없고 정의에는 직선적이고 격정적이었다. 지식은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다. 지식이란 서로가 고립해 있는 듯 보이는 수많은 사람의 협동적 생산물이다. 그리고 싸움없는 철학은 노예의 철학이다. 구격화 된 사상을 거부한다. 이는 그이의 투철한 지론이요 행동지표이다.
정론은 썩지 않은 신선하고 뜨거운 피로 발휘되는 것
군부정권 아래서 지식인들이 입만 열면 대타협이니 관용이니 불보복 운운하며 과거사는 과거에 묻자고 입에 거품을 물었을 때, 최소한 독재의 당사자이거나 협력한 일부 지식인들의 입에서는 함부로 할 말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1929년 노신이 쓴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글을 인용했다. 페어플레이는 페어플레이를 이해하는 상대에게 적용할 때 비로소 공정한 게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독재의 나무를 흔들어 피의 대가로서 손에 넣은 민중의 고귀한 열매를 가로채는 어설픈 민주주의론자들에게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권력이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언론기관도 포함되는 것이며 언론권력은 국민 힘으로 견제돼야한다고 강조했다.
그이는 88년 기자협회로부터 특별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도 후배 기자들에게 ‘신문지 만들지 말고 신문을 만들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권리, 특히 언론의 자유를 말살하는 가장 교활하고 간악한 짓을 한 것이 당신들의 선배들이었다며 다시는 그런 배신자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이는 흔히 신문사가 말하는 ‘정론=중립=불편부당’이라는 표현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왜곡·반민주언론의 궤변이라는 것이다. 정론은 내부에 썩지 않은 신선하고 뜨거운 피를 발휘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기자의 의무란, 정치권력 등 사회적 강력자들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라는 것. 더 나아가 기자란, 지식을 쌓으려는 노력과 함께 누구보다도 청렴한 생활을 해야만 외부로부터 박해를 이겨낼 수 있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건강 악화 되기 최근까지 언론개혁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언론 내부의 반성과 자발적 의지로 이뤄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다시 태어나도 기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노신과 사르트르를 통해 배운 실천적 지식인상
어쨌든 그이는 고은 시인의 표현처럼 역사에 대한 감각이 거의 본능적인 것 같다. 맹수나 작은 벌레들이 그들이 사는 환경의 어떤 일에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처럼 전환기의 역사 그 향방에 대해 아주 지혜로운 지적 수준을 보여준다. 타고난 인식의 역량이며 숱한 수난의 역정에서 터득한 통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이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친 이는 중국 작가이자 사상가인 노신(1881∼1936)이라고 한다. “노신은 사상을 문학의 형태로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 행동화한, 흔치 않은 지식인중의 한 분이죠. 젊은 시절 정신적·사상적 모색으로 고민하던 나는 노신의 많은 저서를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했어요. 단순히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안주하는 교수나 기술자 문예인이 아니라, 부정한 인위적·사회적 조건으로 말미암아서 고난 받는 이웃과 고난을 바꾸어 보려는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에 눈을 뜬 것이죠. 그 의무감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싹튼 것임은 물론이죠”
중국어의 저서를 사전을 찾아가며 힘겹게 읽어 내려가던 어느 날 그이는 한 구절에 큰 감동을 받았단다.
“…가령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자. 창문은 하나도 없고, 여간해서 부술 수도 없는거야. 안에는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불행한 이 몇 사람에게 살아갈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도 몇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면 그 쇠로 방을 부슬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노신이 장개석 총통 치하의 중국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 구절이 마치 이녁을 타이르는 소리로 들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맹목적 광신적 비이성적인 반공주의에 마취된 남한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의식의 전도사가 되어야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단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했고 온몸에 피가 흘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그이가 있는 곳이 바로 이 구절처럼 강철로 된 형무소라는 이름의 방이었단다.
앙가주망의 정신이 지식인 사이에서 논란이 되던 그 시절에 사르트르를 통해서도 지식의 사상, 지성인의 삶의 자세, 역할이란 측면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단다. ‘침묵의 공화국’에서 발견한 한 구절은 한국 사회와 그 속의 이녁 그리고 한국인들의 존재양식을 반추하게 되었고 이녘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신하게 되었단다. “저항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른 사람에게 의무가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밖에 기댈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사람 한 사람이 억압자에 저항하는 속에서, 분명한 구제를 기대하지 못하면서도 자기 자신이고자 했고, 자신의 자유 속에서 자기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선택했다”
교사·장교·외신부장·교수시절 그리고 현재
그렇게 그이는 격랑의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왔다. 1929년 평북 운산에서 태어나 삭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그이는 피난민 시절 공짜로 먹고 공부할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국립해양대학을 들어갔다. 졸업 후 안동중 영어교사로 있다가 6·25 전쟁을 만났다. 스물 두 살이던 시절에 군에 입대 미군사고문단과 국군부대 지휘관 사이 통역장교 생활을 했다. 군 생활 중에도 부대 밖으로 몰래 나가 피난 중인 부모들 생계를 꾸렸고 작전 중 신흥사 불경목판이 소실될 위기를 처하자 이를 원상복구케 하는 등 전쟁 틈새에서도 남다른 시야와 가슴을 품고 있었다. 그랬는가 하면 어느 장교가 막사의 두 부하직원에겐 한 그릇의 밥을 나눠먹게 하고 나머니 병사들은 밖으로 내보내 모내기 해주고 밥을 얻어먹게 하면서 이녁은 몰래 쌀 세가마니를 싣고 부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분통을 참지 못해 몇 차례 때려갈기면서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가는 곳곳마다 정의의 심줄은 결코 오그라들줄 몰랐다.
그렇게 지파란만장한 7년의 군생활을 소령으로 예편한 후 <합동통신>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을 보냈다. 당시 국제정세 해설기사는 이미 정평이 나 있는 터였다. 그이는 아프리카 외신회담,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검토, 박정희-케네디 밀약 등 수많은 특종기사를 썼다. 김동익 前 중앙일보 발행인은 “그이의 기사는 미국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다른 언론사와는 시각이 달랐다. 그런데 미 대사관 직원마저 연구를 많이 하는 사람 같다”고 평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이의 비판적 기사에 당시 정부당국이 수수방관할 리는 만무했다. 몇 번에 걸쳐 외유 기회를 주겠다는 회유와 사표종용이 잇따랐다. 이윽고 <조선일보>는 한국의 국가이익과 반공이념에 잘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표 종용을 했다. 며칠을 두고 생존 문제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신문사를 그만 두기로 했다. 그이는 사표의 의미를 '인텔리 자격의 사표'라고 했다. 사회와 대중을 지식으로 사기 치고 스스로 불성실한 글줄을 써서 먹고사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뜻이었다.
그 후 닭똥을 져 나르며 양계, 책장사 등을 했다. 여학생들이 오가는 삼선교 위에서 얼굴에 얼음장 문지르듯 불어대던 살바람의 세월은 차라리 참담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법원 골목에서 책꾸러미를 놓고 한 숨 쉬고 있을 때 <합동통신> 후배인 기자와 마주쳤다. 그 수모는 왈칵 두 눈으로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합동통신 옛 동료가 집으로 찾아왔다. 마침 통신사 기구 확장으로 외신부장 자리가 비게 되어 와달라는 것이었고, 그렇게 다시 외신부장 자리를 되찾았다. 이후 72년 한대 신문학과 교수 재직→유신체제에서 해직→80년 봄 복직→해직→복직을 거듭했다. 그리고 현재는 이 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이면서 병마와 또다시 투쟁중이다.
철저한 자기검열과 원칙적 삶 일구기
진보적이고 격정이었던 그이. 선친이 써놓은 한문으로 된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자식의 성질이 급하고, 화를 잘 내고, 격정적이고, 대들기를 잘 하고, 본대로 말하고, 언사를 자제하지 못하고…해서 그 장래가 심히 걱정이 된다”라는.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본 눈이 소름끼칠 만큼 정확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그이는 석가모니가 ‘탐·진·치’를 훈계한 말씀을 마음 깊이 아로새기며 이를 교정하고자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탐은 소유의 집착, 진은 성급하고 쉽게 화를 내고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독이라는 뜻이다. 선친이 걱정한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치는 미련하고 집착하고 암울하고 깨우치지 못하는 독을 이름이다. 이런 사실을 공개한 데는 그만큼 이녘에 대한 겸허함으로 들린다. 그리고 자기분석에 철저했다는 반증일 터이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자기검열 철저했기에 여지껏 절제된 삶과 글, 그리고 삶의 원칙과 철학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이는 한양대 교수시절에도 학생들에게 엄격한 수업과 군더더기 없는 글쓰기를 가르쳐왔다고 제자들은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면 늘 인자한 아버님의 모습이었단다.
필자가 87년 첫 기자시절 그이를 첫 인터뷰했을 때도 그랬고 그 이후로도 내내 잔정을 베풀어주셨던 모습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몸베를 입고 거실에 걸레질을 하던 검소한 아내와 함께 단란하게 살아가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다만 공자 앞에서 문자 쓰고 있는 필자의 처지가 불경죄라도 짓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수록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어쨌거나 그런 심지에서 불꽃 튀기는 진실과 깨달음의 연속이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고 그런 확장작업의 가속도가 붙을수록 우리네 민중은 우상을 넘어 현실에 두 눈을 부릅뜨게 됐을 터. 현재 그이는 병마와 싸우고 있다. 오래 전 만성기관지염, 디스크 등으로 고생한 바 있던 그이가 했던 이를 이겨내고 글쓰기를 다잡았을 때 많은 독자들은 반가워했다. 그러나 지난해 다시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실어증으로 고생하다가 물리치료를 반복하면서 많이 좋아지고 있다니 다시 글맛을 기다릴 수 있는 희망을 가져봄은 어떠할 런지... 한국민주주의의 척박한 토양에 손수 밀알을 뿌리고 그 밑동에 고난의 밑거름을 한 층 한 층 쌓아올렸던 장본인들이 변화된 시대를 만나 공을 받기는커녕 병마와 싸우고 있는 현실이 정녕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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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2002년 미디어비평지 OKNO(오크노) 제 6호에 ‘우리시대 참지성을 찾아서’ 연재물을 바탕으로 재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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