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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희망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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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방울 2010. 4. 1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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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다시보기]

 

우리시대 희망은 있는가

 

박상건(성대 겸임교수)

 

봄날 개나리꽃이 만발했다. 옹기종기 모여 몸 비비꼬며 사는 풍경이 흡사 서민의 삶을 닮았다.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이다. 삶이란 희망을 찾아 하루 한 페이지씩을 써 가는 일이다. 그런데 요즈음 이 한 페이지씩 넘기는 일마저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천암함 침몰 후 당국은 진실이라고 말하고 민심은 억측과 불신의 파편조각만 나부낀다. 함수와 함미, 사리와 조금, 인양 중단과 재개라는 두 단어 사이를 뛰어 넘지 못한 보도프레임은 9회말까지 레퍼토리가 반복되는 야구중계 수준만도 못하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를 기다리던 가족들도 돌아올 수 없었다. 이날 이군은 어머니 친구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한겨레 4.5). 자녀들은 물에 잠긴 아버지를 기다리며 홀로 끼니를 해결하며 힘겨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한쪽 부모 역시 생업을 포기한 채 사고현장에서 애간장만 태운다.

감동과 신뢰의 기저에는 휴머니즘이 있다. 휴머니즘(humanism・인본주의)은 600년 전 권위주의에 질식되어 가던 인간성 회복운동이었다. 그 생명력의 원천은 진실이다. 최근 1주일치 신문에서 '희망'을 키워드로 뉴스를 검색해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치단체와 6.2 지방선거 출마후보들이 이 단어를 즐겨쓰고 있었다. 거개 이벤트용 단어로 희망이 저당잡혀 있었다. 그들의 말잔치에 산전수전 겪은 국민들이 현혹될 리도 만무하지만 기자들의 서민지향적인 현장 이야기를 보도하는데 지극히 소극적이라는 사실이다.

예전보다 신문은 두툼해졌지만 8쪽 신문의 잉크냄새에 묻힌 휴먼스토리를 찾아 읽는 감동이란 게 없다. 휴머니즘적인 기사는 한 줄 기사, 한 컷 만평과 사진으로도 가능하다. 보도기호학에서 그 한줄, 한 컷의 기표와 기의(의미)가 미디어와 인간, 자연과 인간을 교감케 한다. 저널리즘에서 이성과 합리성은 감성과 대조적 개념만은 아니다. 각진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정반합(正反合)의 원리로 소통한다. 또한 글로벌과 첨단산업사회를 제 아무리 강조한들 5% 상층부를 지탱한 것은 95% 개미인생이다. 그것이 한 시대의 역사를 추동하고 문화로 작동하는 에너지이다.

물론 친서민적이며 희망찾기 보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로스쿨에 재학 중인 1급 지체장애자가 “사회가 그려놓은 이상적인 장애인 상에 맞추지 않고 내적 욕구에 따라 살고 싶다”고 말한 문화면 한 줄 기사도 강렬한 화두로 눈길을 끌었다(한국 4.10). 청각장애인들이 떡 프린스 1호점을 오픈한 이야기도 가슴 뭉클했다. 우리 농산물로 찰떡, 설기, 송편, 떡샌드위치 등 30여종의 상품을 개발해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고 수익금으로 또 다른 장애인에게 자활의 꿈을 키운다는 이야기였다(서울 4.9).

청년실업난에도 불구하고 대학생들이 30일 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기성세대와 토론하고 기업가정신을 배우면서 우리 사회현실을 바로 알고자 노력하는 모습(전자신문 4.9), 희망근로자 할머니가 땀흘려 모은 급여를 학생들 장학금으로 기탁한 이야기(충청 4.6), 부산 사상지역자활센터에서는 자활프로그램 참여자들에게 문학, 역사, 철학 등 ‘행복한 인문학’ 강의를 실시하는 중인데 강의를 듣던 수강생이 눈물을 흘리고 인문학을 통해 인생후반부를 설계하고 있단다. 인문학이 자세를 낮춰 빈곤과 소외계층을 찾아가 그 빛을 발하는 모습 또한 희망뉴스 중 하나이다(부산 4.10).

이처럼 세상에는 작지만 서민들의 미소와 희망이 잔잔하게 흐르는 이야기가 많다. 권위와 정치성이 제거된 자체로 친화감과 생동감, 감동을 준다. 국무회의, 당무회의, 기자실, 선거구에서 오가는 판박이 미사여구가 아니어서 좋다. 그래서 달동네 후미진 골목 혹은 새벽길을 열어놓은 미화원과 땀방울 뚝뚝 흘리며 우동 한 그릇 후르륵 마시는 그런 지도자 사진 한 컷이 더 신뢰감을 준다. 집어등 불빛 아래 그물질하며 체온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어부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다.

서민은 서민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한다. 공감과 감동없는 보도는 분노와 분열만 낳는다. 권위적이고 계몽주의적 보도가 불신과 허무만 도진다. 지뢰처럼 지면에 깔아 놓은 의도성이 계층간 차이를 만들고 차이는 공동체사회에 차별을 낳는다. 이는 국론분열의 지름길이다.

국내외에서 슬픈 뉴스들이 쏟아지는 '잔인한 4월'이다. 시 '황무지'의 배경은 정서적 메마름, 불신, 죽음이다. 그러나 이 잔인한 봄도 빗소리를 만나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그 전제는 묻힌 진실과 생명력의 각성에서 비롯된다. 사계절 순환적인 삶의 생명은 망각과 재생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4월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한국기자협회보 201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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