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풍경 25] 한하운 作, 보리피리
보리피리에 나부끼는 남녘바다의 그리움이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피-ㄹ닐니리.
- (한하운, ‘보리피리’ 전문)
얼마 전 흑산도 여행 갔을 때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한 마리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풀을 뜯다가 먼 바다를 쳐다보고 있는 어미소를 바라고 있노라니, 마치 객지에 나간 자식들을 그리는 어미의 마음과 오버랩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골 사람들의 애증이 뒤편으로 펼쳐진 보리밭으로 출렁이더니만 이내 그 물결 속에서 피닐니리 피닐니리 보리피리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보리피리’는 1955년의 작품이지만, 넘실대는 남녘바다, 농부의 애잔함, 어린 시절의 아련한 편린과 추억들을 죄다 되씹게 해준다. 그렇게 일렁이는 보리밭에서 추억의 물결소리는 한동안 철썩철썩 밀려와 젖어들기를 반복했다.
우리에게 ‘보리’가 주는 느낌과 의미는 남다르다. 가난의 기억과 극복의 삶, 그리고 도심에서 찌들린 사람들에게 향수를 가득 불러일으킨다. 파노라마처럼 유년시절의 풍경을 떠올리면 음메~~하는 소 울음과 쟁기질, 느티나무, 시냇물 등등 그 풍경화가 참으로 아름답고 그려진다.
대한민국 백성치고 한 다리 건너 농민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랴. 수구초심이라 했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하고 죽는다는 말. 예기(禮記) ‘단궁상편’에 나오는 이 말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람이 근본을 잊지 않는 마음을 일컫기도 한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살면서도 잠시 고향 그리고 자연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잊고 살았을 뿐이다. 자연의 극치는 사랑이다. 사랑 없이 자연에는 접근할 수 없다. 농부들은 애초부터 그런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을 일구고 동행하면서 영원한 자연의 지킴이를 자처했던 셈이다.
보리밥이 도시에서 웰빙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시골에 보리농사 짓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1970년대 중반 통일벼가 등장하면서 보릿고개 시절에 종지부를 찍었다. 어릴 적 할머니는 굴렁쇠를 굴리며 마을을 돌고 돌아다닌 후에 헐떡이며 사립문을 들어서는 손자 녀석에게 “아서라, 아서라, 배 꺼질라 그만 뛰어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면서 부엌문 위에 걸려있던 삼태기에서 보리개떡 하나를 내어 주곤 했다. 아무튼 그 시절이 가고 우리네 농민들이 잘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네 보릿고개 시절의 추억마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영 사라지지는 못할 것이다.
산업화 진전이 빠를수록, 살다보면 지칠 때도 그 어렵던 시절, 퇴비를 하려 다니던 시절, 쥐불놀이를 하며 잡초를 태우던 시절의 기억은 우리네 마음을 다 잡게 해줄 것이다. 그런 보리에 대한 회상은 우리에게 많은 상징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서울에도 몇 군데 자치단체에서는 구청 뜰에 보리밭을 가꾸고 보리화분을 계단마다 진열해 놓는 광경을 보았다.
전북 고창 청보리 축제에 수십만 명이 몰리는 것도 이러한 추억에 대한 되새김질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보리피리도 불고 보리개떡 만들기를 통해 전통농업의 향수에 젖어보는 것이다. 또한 관광농업의 가능성이 무한함을 확인하게도 해준다.
보리가 봄날에 열정으로 익어가서 황금들판을 되돌려주는 것은 인고의 세월을 감내해온 모성애의 상징으로도 다가선다. 객지에서 보리이삭 같은 땀방울 맺으며 살아가는 그 후예들의 삶과도 비교된다. 그런 삶을 반추해보게 하는 것이 보리이다. 곡식도 사랑 없이는 성장하지 못한다. 농부의 발길과 손길이 닿는 만큼 자라는 것이다. 그런 곡식의 열정, 열정 없이는 열매 맺지 못하는 보리의 삶과 우리네 삶과 무에 다르랴.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